알라딘서재

옥탑방
  •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
  • 14,250원 (5%750)
  • 2009-09-15
  • : 1,176

박찬일의 팬이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 읽는 내내 즐거울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여기서는 책 얘기 말고 딴 얘기를 써보려고 한다.

 

창비 책은 조금만 읽다보면 짜증이 치민다. 이 책의 경우 첫번째 페이지 두 번째 문장부터였다. 바깡스. 대체 그 이해할 수 없는 표기법에 대해서. 대체 어느 나라가 외국어나 외래어를 표기할 때 창비식으로 하는 지 알 수 없다. 한 번 따져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식의 표기법은 한국어를 아주 모욕하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가능하면 실제 존재하는 수 많은 변수들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입말보다 글말은 당연히 더 보수적이고 안정성을 추구한다.창비식의 표기는 한국어를 마치 발음기호로 전락시켜버리는 일과 같다. 어떤 언어든 실제 발음과 표기되는 방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창비 편집실은 그것의 불일치를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수십년간 우리가 포르투갈이라 쓰고 에스파냐라고 썼던걸 굳이 원어발음과 일치시켜야 한다는 원칙 하나로 뽀르뚜갈, 에스빠냐라 표기해야 한다는, 별로 설득력 없는 강변. 창비가 말하는 그 원칙, 그러니까 현지발음을 준용해야 한다는 원칙도 우리가 외국어나 외래어를 표기할 때 참고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유일한’ 원칙이 되면 곤란하다. 그 원칙 말고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복수의 원칙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론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반대로 영어나 한자의 경우 한국어와 달리 그렇게 표기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긴 할 것이다. 실제 발음과 철자가 다르다고 해서 철자 한 두개를 넣거나 빼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한자도 마찬가지로 획 한 두개를 넣거나 뺀다는 건 글자 하나를 새로 만들어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임의로 표기법을 고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Paris라 쓰고 프랑스인은 빠히(에 가까운) 라고 읽고 미국인은 패뤼스라고 읽는다. 대체 이게 뭐가 문젠가. 미국인도 프랑스인과 같이 그걸 빠히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심지어 철자를 임의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웃음거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 이름, 가령 베네치아를 영어에서는 베니스라 읽는다. 철자도 다르고. 이게 뭐가 문젠가. 이걸 문제삼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나는 없다.

 

 

가령 영어의 s로 표기되는 단어는 대개 영어의 z발음(한국어 철자체계에서는 이걸 표기할 길이 없다)이거나 우리말 발음으로 ㅆ(쌍시읏)발음, 둘 중 하나다.(그런데 사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케이스바이케이스인데, 왜냐하면 말이라는 게 가령 자음동화 등과 같이 특정 철자의 전후에 있는 철자를 발음의 영향으로 쉽게 발음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서, 구체적인 단어마다 미세하게는 다 다르다.) 아무튼 영어의 s가 우리말 ㅅ(그러니까 스)으로 발음되는 경우는, 내가 아는 한, 없(거나 거의 없)다. 창비가 bus를 어떻게 표기했었는지 가물가물한데, 창비식이라면 그것도 버쓰라고 표기해야 할 것이다. 내 기억에 kiss를 키쓰라고 표기했으니 버스가 아니라 버쓰라고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한국어는 그저 외국어를 현지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발음기호로 전락시켜버리게 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현지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는 원칙 말고 다른 원칙은 뭐가 있을까. 첫 번째. 지금까지 해당 외국어나 외래어를 어떻게 표기해왔는지를 감안하는 것이다. 가령 인명 중에 이런 인명이 있다. Slavoj Zizek. 어떤 사연이었는지 이 사람의 저작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 슬라보예 지젝이라고 표기됐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한 참 지나서 사실 알고보니 현지발음과는 많이 다른 발음이었다. 현지발음은 슬라보이 지제크에 가깝다. 창비와 비슷한 표기법에 대한 원칙을 공유하고 있는 한겨레는 이를 놓치지 않고 슬라보이 지제크라는 표기로 바꾼지 꽤 됐다. 여전히 창비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창비는 현지발음과 동떨어진 표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 경우는 다른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점은 창비가 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점이다. 나는 이유야 어찌됐든 그 표기가 이미 대세가 돼버렸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유태계)독일 출신 Karl Marx와 (유태계)폴란드출신 Karl Planyi의 표기 문제다. 아마 Marx가 우리에게 마르크스라고 표기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일본의 문자체계에서는 그렇게 표기할 수밖에 없으며, 그걸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걸 북한이나 1980년대 이후 남한에서 맑스라고 표기했던 건 현지발음에 대한 고려 외에도 일제잔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이 반영돼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냐 맑스냐에 대해서 똑부러지는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실제 표기할 때 나는 마르크스라고 쓴다. 그렇게 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고유명사를 대세와 다르게 표기해서 득될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표기해왔다면, 옳든 그르든 그게 한국어체계의 안정정 체계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니 굳이 그걸 흔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는데, 위의 두 사람의 저작을 모두 출판한 길출판사의 표기법이다. 길출판사는 위 두 사람을 카를 마르크스, 칼 폴라니라고 표기한다. 창비야 나름 일관성이라도 있지만, 일관성도 없는 이건 뭔가 싶다.

 

두 번째는 나름의 원칙을 공유하는 테이블을 마련하여 결론이 정해지면 창비나 한겨레와 같이 임의의 독자적인 원칙을 가지고 ‘색다르게’ 표기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일단 정해지면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따라야 한다. 아직 그런 테이블이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게 조직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각 출판사들이 가능하면 색다른 원칙으로 색다르게 표기하는 것을 일단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Susan Sontag을 검색하기 위해 수잔 손택, 수잔 손탁, 수전 손택, 수전 손탁 등등을 일일이 검색해봐야 하는 불필요한 수고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여기에 한 가지,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도 일정하지 않은 원칙 때문에 종종 고생한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덧붙여두고자 한다.(이건 외국인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다) 가령 요즘은 여권발급을 대행하는 구청 등에서 아버지 성과 자식 성의 영문표기의 일치여부를 따졌지만, 그러기 이전에는 아버지와 자식 성의 영문표기가 다른 경우도 꽤 있었다는 점,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외국어 표기에 대해 무원칙한지를 알려주는 지표일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