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가 어땠는 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운이 좋게 시험 점수를 잘 받아 한번에 원하는 대학엘 갔고, 고등학교까지 짓눌렸던 내 자유를 마음껏 풀어 헤치며 살았다. 방종까지는 아니었을 지라도, 나의 기본적 원칙 중 하나였던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에 맞추어서 대학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본 것 같다. 단 하나 소개팅 빼고. 아,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시험 때 공부는 했고, 강의도 들었고, 과제도 냈고 8학기만에 무사 졸업했으므로 한 걸로 치자.
졸업 후 잠시 '業'에 대한 방황 후, 기업체 취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기업체 취업이 쉬웠던 건 아니다. 나의 스펙을 보고 들어오라고 허락해준 곳은 오로지 지금 이 곳,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하는 회사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입사를 했고 난 무거운 엉덩이로 주저 앉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 몇년 후 수능으로 입시 제도가 바뀌었으니, 비교적 오랜 기간 안정된 입시 제도의 혜택으로 큰 혼란 없이 대학에 들어왔고, 유난히 수학이 어려웠던 시험 탓에 수학 점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나는 입학하며 등록금을 제하고도 오히려 방학 동안 놀 수 있는 용돈을 학교로부터 받았다. 학교를 졸업할 당시 서울에서 지리교사 TO 가 없었던 것은 정말 운이 나쁜 케이스였고, 결국 지금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졸업하던 그 때까지만 해도 맘만 먹으면 취업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입사하던 그 즈음에는 IT 붐이었고 기업마다 SI 업체를 비대하게 늘려가던 시기였다. 내 입사동기가 500명이 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다 몇년 후 바로 IMF 가 터졌고, 그 이후부터 대학생들의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나도 한참을 팀의 막내로 살아야만 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나의 20대는 어떠했는 지 돌아보게 됐고 그러다보니 장황한 삶의 궤적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파란만장한 20대에 비하면 너무나 우아하고, 고상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배부르기만 한 20대이다. 나도 치열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 20대이지만, 비할 바가 아니다. IMF 이후의 어려워진 경제를 온몸으로 껴안고, 그 때 벌거숭이 상태로 사회를 마주 대해야만 했던 불행한 세대. 더군다나 가진 것 하나 없는 집에서 태어나, 오히려 가정을 돌보아야만 했던 준소녀가장. 자기 몸 뉘일만한 공간이 없어 더부살이를 해야만 했고, 점점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서 살아야만 했던 가난한 청춘. 이땅의 88만원 세대가 어떻게 살아야만 했는 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맨얼굴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가슴이 아프다.
한없이 당당하고,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이겨내는 눈부신 젊음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프다. 그런 젊음에게 이제 난 배때기 부른 기성세대일 뿐... 그러나 이제 내 얘기가 아니라고, 어깨 툭툭 치며 극복하라고 하며 뒤돌아서기에는 이 굴레가 너무나 크고 깊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라면 그저 암담할 뿐이다. 청춘이 처한 현실을 청춘에게 해결하라고 해서는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자기의 청춘 자서전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자격지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불쑥 불쑥 튀어나와 당황하게 만드는 허황된 욕심들, 가진 건 없지만 나눌 줄 아는 소박한 옛동네의 인심들, 가진 것 없어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위태롭게 이어지는 사랑, 다양한 삶의 모습과 인간 군상들이 지금은 하나씩 짓밟혀져 간 서울의 뒷골목들을 무대로 이야기 꽃을 피워낸다. 간혹 피식거리며, 간혹 시큰거리는 콧등을 만져가며 휘리릭 책장을 넘기도록 만드는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이 땅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상에는 기억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기억이 죄다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