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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미님의 서재
  • 백석 평전
  • 안도현
  • 16,200원 (10%900)
  • 2014-06-09
  • : 8,101
2016. 10.30 독서모임 안도현, 『백석평전』

1. 백석의 시 주제가 토속적이면서도 모더니즘의 극치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모더니즘[국어국문학자료사전]
문예사조의 하나. 19세기 말기에 유럽 소시민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20세기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였다.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라고도 한다. 기존의 리얼리즘과 합리적인 기성 도덕, 전통적인 신념 등을 일체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예사조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토속 (土俗) [토속] [명사] 그 지방의 특유한 풍속.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시라고 하면
①전통시가 가지고 있던 음보율(3음보, 4음보) 등의 운율적 측면보다는 이미지/회화성에 초점을 두는 점
②감정절제, 주지주의의 모습
③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④탈권위로써의 형식의 파괴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학교에서 모더니즘 시, 모더니즘 시인에 대해 배울 때 백석의 시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백석의 시에서 모더니티를 느낀다. 그렇다면 백석의 시가 갖는 모더니티는 무엇일까?

p.100. 김기림을 필두로 한 1930년대 일반적인 모더니즘의 언어와 백석의 언어를 확연하게 구별하는 점.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이상 들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을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직수입하였다. 그들은 도시문명에 경도되었고, 회화적 이미지를 자주 구사했으며, 때로 상징적 수법을 과용하면서 근대성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몸은 없고 관념만 앙상한 시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백석은 달랐다. “백석은 시어를 현실생활과 거리가 있는 생경한 ‘지식의 언어’가 아닌 생활과 일체감을 느낄 수 이는 명료한 일상의 어휘로 운용하였다.”(최정례,『백석 시어의 힘』, 서정시학,2008)

p.96
『사슴』은 그 외관의 철처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은 백석의 시가 기억 속의 동화와 전설에 나오는 소재, 그리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취하고 있지만 거기에 따른 감상주의와 복고주의를 일체 배격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는 백석의 시에 내재된 모더니티를 발견하고 그 모더니티가 치열하고 철저한 비타협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책에서 언급하는 이러한 내용 외에 백석시의 모더니즘 경향을 한승태는 본인의 논문 ‘백석 시의 모더니즘 경향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낡은 형식의 파괴, 새로운 형식의 창조 자체가 모더니즘의 예술 원리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제외하고 백석의 시에는 ‘구두점, 쉼표, 마침표’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이 총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질서한 현실, 개인의 의식 속에 잡다한 생각을 형식에 반영한 것이다.
->모더니즘은 탈권위이다. 운문은 이렇게, 산문은 저렇게 써야한다는 것 자체가 ‘권위’라는 점에서 백석의 시는 사물의 나열과 산문시의 형식으로 ‘형식’이라는 권위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을 백석의 시에서 우리가 모더니티를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② 객관적 감각성, 백석은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묘사하여 객관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③내적 운율을 획득한 산문시 형식
④‘함경도 방언’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
이는 단순한 시도가 아닌 식민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독자적 방안이라는 점이다. 치열하고 철저한 비타협의 소산!





2. 백석은 왜 정치적 성향을 배제한 시를 썼는가?

백석이 살던 시대의 정치는 일제 강점기, 해방직후 혼란기, 분단 후 이념 갈등의 상황이었다. 그 시대를 비판하고 풍자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실상 정치적 성향을 시에 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정치적 성향이 짙은 시라고 하면 1920년대 카프문학처럼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거나 친일문인들처럼 당시 정치세력에게 유리한 선동적인 시를 쓴다거나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백석은 일복유학 때 받았던 1)이시카와 다쿠보쿠&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영향(p 50)도 있었을 것이고 2)목적성에 경도된 카프문학의 모습이나 현실인식과 민족의식이 결여된 당시의 순수시나 모더니즘 시의 모습도 마뜩잖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성향은 배제하되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시를 쓰는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일본 유학시절 습작기부터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1930년대 중반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가치체계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늘에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석은 주관적 감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그 무엇`은 새로운 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 ->음식, 방언
-‘백석과 음식’
백석의 시에는 유년과 관련된 음식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는 음식의 기억을 집요하게 시에 끌어들여 과거의 시공간을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p16) 백석이 유난히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도 아니고 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음식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각을 활용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다. 그는 민족적인 것의 원형, 혹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친 시인이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역사성의 현실적 현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217p)
-백석 시의 방언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함(98p)


이동순,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시」
“청록파 시인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신경림, 박용래, 이시영, 김명인, 송수권, 최두석, 박태일, 안도현, 심호택, 허의행”의 시가 백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견해 피력.

유성호, 「백석 시의 영향」
①근대 혹은 ‘근대적인 것’에 대한 반성적 전거
②‘시각’보다는 ‘후각/미각’으로 경사된 사물 인식 방법
③‘가난’의 시적 기표를 통해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보인 현실 이해 방식
④운명 또는 생의 형식에 대한 중후한 성찰의 태도와 그 특유의 산문시형






3. 백석의 시 중 가장 맘에 드는 시 1편 외워오기 (백석, 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긴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함께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4. 책 속 편린들로 보는 백석


p.12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p.36 ‘백석과 소월’
소월이 선배로서 백석의 문학적 감성에 불을 질렀지만 백석의 시가 소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백석은 의도적으로 리듬을 거부했다. 소월이 시의 ‘노래’로서의 기능에 심취했다면 백석은 묘사를 통한 ‘이야기’의 효과에 더 끌렸던 것이다.

p.45 고향(아버지로 섬기는 이, 지원자 방응모)

백석에게 영향을 미친 시경향~p.52

백석은 외모만 ‘모던보이’가 아니었다.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보다 앞선 주요한이나 정지용은 유학시절부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백석의 외양묘사 p.62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백석, 비(p.85)

p.125. 선우사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이동순,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시」
“청록파 시인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신경림, 박용래, 이시영, 김명인, 송수권, 최두석, 박태일, 안도현, 심호택, 허의행”의 시가 백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견해 피력.

p.140
산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켠을 본다
백석, 산비





p.156 백석, 1937년의 봄 백석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통영의 박경련과 그의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의 결혼소식.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백석은 수첩에 적혀있던 신현중의 이름을 붉은 펜으로 지워버렸다.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과 음식’
백석의 시에는 유년과 관련된 음식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는 음식의 기억을 집요하게 시에 끌어들여 과거의 시공간을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p16) 백석이 유난히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도 아니고 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음식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각을 활용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다. 그는 민족적인 것의 원형, 혹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친 시인이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역사성의 현실적 현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217p)



161p
<조선일보> 방응모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친일
카프를 이끌었던 박영희의 변신 1934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전향선언,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공개적으로 친일 문인조직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183p
노천명, 사슴
점잖고 고결한 존재인 사슴, ‘사슴’이 백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석이 두 해 앞서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는 점, 그리고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 아예 백석을 ‘사슴’이나 ‘사슴군’으로 호칭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두 시편 사이의 친연성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193p 멧새소리
259p 흰 바람벽이 있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상투적인 시어 사이에 ‘높고’를 끼워넣음으로써 시는 갑자기 쓸쓸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시인의 위치를 드높은 정신의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흰 바람벽이 화자의 의식의 스크린 구실을 하고 있는데 예사로워 보이지만 절묘한 착상이요 전개”(유종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속내를 직접 토로하지 않고 지나가는 글자들로 말하게 한 데서 박력과 호소력이 생긴다.”(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218 이광수의 철저한 친일, 만주로 떠나는 백석

278 백석의 창씨개명. 그러나 백석이 이렇게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일이 전혀 없다는 점. 백석은 백석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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