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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미님의 서재
  •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 12,600원 (10%700)
  • 2005-11-18
  • : 15,522

이전에 읽은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녀석이 남자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이야기였다면 이번에 읽은 `우리는 사랑일까`는 여자주인공의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의 시작과 절정 끝에 관한 이야기이다.

줄거리 자체는 앨리스가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난 에릭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권태의 시간을 겪고 결국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뻔한 스토리. 뻔한 스토리가 나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뻔하지 않은 이야기보다는 뻔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공감하기 마련이니. 이번 책 역시 뻔한 사랑이야기를 다양한 미학,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을 동원하여 뻔하지 않게 펼쳐내고 있다.

 

초반에는 앨리스가 다소 허영심 많고 계산적인 여자처럼 그려져 있어 보통이(혹은 남자가) 바라보는 여자라는 존재가 이런 건가 싶어 (이미 그의 팬이 되어버린 나로서는)다소 거슬렸지만, 읽을수록 남자 작가가 여자의 심리를 이렇게 깊숙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게 (연애 중 나의 속내를 남자가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어 내려갔다.

지금보다 어렸던 어느 시절, 누군가를 아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했던 시절의 내 모습이 앨리스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아서, 보통의 책답게 어렵고 이해 안 가는 문구들이 나올 때도 열심히 곱씹으며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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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릴 코널 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의 반열로 격상된 셈이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아? 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2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지도록 한다. 그는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여자친구를 몇 명씩 유지하는 것,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게 충분히 많은 집단과 교제하는 것, 어느 거래가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게 돈을 많이 버는 것 등이 그 남자가 세운 기둥들이었다.

그녀는 이와 딴판으로 매우 현명하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녀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모으는 경향이 있었고, 그 기둥 하나가 온 무게를 견디길 바랐다.

최근에 그런 기둥이 된 그는 그 역할을 맡는 게 못마땅했다. 그 남자에게는 개입하기를 꺼리는 구석이 있었다.

 

#3

특정한 학문 영역에는, 명쾌한 설명에 편견을 갖고 난해한 글을 존중하는 오랜 경향이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빡빡한 글에 몰두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발상에만 끌리는 게 아니다. 학자들은, 문외한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배배 꼬인 언어를 헤치고서 그 사상을 찾아내는 작업의 순수한 어려움에 매혹을 느낀다. 예민한 독자는 ‘이 글은 정말 심오하구나.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걸 보면 나보다 똑똑하구나. 이해하기 어렵다면, 틀림없이 이해할 만한 가치가 더 클 거야’라고 생각한다. 학구적인 자기학대는 은유적인 편견을 반영한다. 진실은 얻기 어려운 보물이며,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경박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다. 앨리스는 에릭의 침묵을 그 남자가 심오하고 흥미로운 존재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헤겔을 천재라고 믿으며 평생을 바쳐 헤겔의 책을 읽는 학자와 비슷했다-어느 매정한 비평가는 이 비중 있는 철학자가 결국은 극히 평범한 사상가이며, 두세 가지 발상은 그럴듯하지만 표현력이 지독하게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했건만.

 

#4

누군가에게 ˝불안감이 엄습해 오네요˝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활발하게 ˝무슨 말이에요?불안할 게 뭐 있다고 그래요?˝라고 대답하면 외롭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을 비웃어버리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는 해학적인 기지와 함께 서로의 사고방식과 인류학적 관심을 나눌 기회를 앗겨버린다.

 

#5

그녀의 감정적인 욕구는 상대가 가져다 준 조각 없이는 불완전한 퍼즐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 발전하면서 빈 공간은 변하고, 열다섯 살에는 딱 맞았던 조각이 서른 살 때는 필요치 않게 된다. 빈 자리는 윤곽을 다시 그렸고, 퍼즐-사람이 그에 맞춰 변하지 않으면, 그녀는 헤어지거나 곤란을 무릅쓰고 결론을 끌어내고자 했다.

앨리스가 에릭에게서 사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변천해온, 그녀 안에 없는 퍼즐 조각이었다.

고통은 성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함께할 수 있는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한동안 합치되었던 것은, 넓고 갈림길이 많은 길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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