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kekek
  • 우리가 쓴 것
  • 조남주
  • 12,600원 (10%↓700)
  • 2021-06-18
  • : 1,429

#조남주 #우리가쓴것 #0판1쇄 #미리뷰어 #민음사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분홍신을 신은 발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이랑,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의 가사.

-「오기」, 58쪽

.

"어땠어요, 할머니?"

지혜가 묻자 어머니는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눈을 감더니 그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눈앞에서 막 춤을 춰. 나를 감싸서 우주로 데리고 날아가. 우주는 이렇게 넓고 끝도 없구나, 나는 그냥 먼지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이 들어."

"할머니 설마 인생무상 이런 거 깨달으신 건 아니죠?"

"악착같이 살아야지, 깨달았다. 나라도 이 먼지 같은 나를 아끼고 아껴서 훌훌 날아가지 않게 잘 붙잡고 살 거야."

-「오로라의 밤」, 254-255쪽

.

조남주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 가제본을 받아 읽게 되었다. 나에게 조남주 작가는, 아마 많은 독자들에게 그러하겠지만,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이러한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으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사실 그 책 안에 담긴 이야기는 그리 충격적이거나 파격적이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오히려 소설 바깥에 있었지.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바로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이 친근하고 익숙한 이들이다. 치매에 걸린 큰언니를 바라보는 80대 노인, 이제 막 어떤 굴레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한 30대 사회 초년생, 또 어느 날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로 훌쩍 떠나는 50대 중년의 교감 선생님. 각기 다른 연령,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도 이들은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수많은 것들의 앞에서 결코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이고, 당신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인 것들에 대해. "결국 내가 졌다"는 생각에 괴로워 하다가도 이내 "악착같이 살아야지"라며 마음을 다잡으면서.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그리 인상적이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 관계가 종종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로라의 밤」에 나오는 '효경'과 그의 시어머니인 '동주'이다. 이 둘은 "며느리하고 시어머니는 단둘이 여행을 올 수가 없어. 그 둘은 절대 그럴 수가 없는 사이야."(243쪽)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특히 독자의 예상을 깨며 유쾌하게 던지는 시어머니 '동주'의 한 마디 한 마디란. 이런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는 것 또한 이 책의 커다란 재미이자 의미 중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의 해설에서 김미현 교수는 "여성들의 삶이 주변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의 누비이불"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읽으면 실과 바늘을 손에 들고 한 자리에 둘러 앉은 여성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누군가는 여러 번 바늘에 손을 찔려 가며 서툴게 조각을 꿰맬 것이고, 누군가는 노련한 솜씨로 튼튼히 바느질을 해 갈 것이다. 저마다 조각을 잇는 속도와 모습은 다를 지라도, 그들이 함께 엮은 누비이불은 꽤나 멋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이불은 점점 커질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누군가 바느질을 멈추면 또 다른 누군가가 와서 그 실과 바늘을 이어 받을 테니.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든든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