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박쥐를 드디어 읽게 됐다. 그동안 해리 홀레 시리즈를 워낙 재밌게 읽기도 했고 첫번째 작품이 웬만큼 성공하지 않고서야 시리즈가 장기간 길게 이어지기 힘든 만큼 해리 홀레 시리즈의 탄생작인 박쥐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해리 홀레 프리퀄은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고 어설프기도 했지만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는동안 느껴졌던 공백을 마침내 찾아 채울 수 있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요 네스뵈는 박쥐에 대해 날것 그대로의, 통제 불가능한 느낌이 좋아서 유일하게 반복해 읽는 작품이라고 언급하는데, 나는 번역본으로 접해서 그런지 몰라도 해리 홀레의 통제되지 않는 매력은 최근작들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박쥐는 번역자가 기존 시리즈와 달라서인지 데뷔작 특유의 어설픔 때문인지 전체 시리즈 중에서 가장 노말하고 담백한 작품이기도 하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하기에 딱 적당할 만큼.
해리 홀레 시리즈의 시작은 특이하게도 해리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노르웨이가 아니라 호주에서 시작한다. 책 속에선 호주를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표기해서 지명이 언급될때마다 오스트리아랑 계속 헷갈렸고 덕분에 책 속에 등장하는 호주사람들이 해리 홀레를 해리 홀리(Holly)라고 착각하는 것에 절로 공감됐다. 해리는 짜증내다가 체념해 버렸지만 나는 끝까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표현이 거슬리고 헷갈렸다. 어쨌거나 박쥐에 등장하는 해리는 호주사람들이 홀리라고 부르는게 납득이 갈 만큼 시리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젊고, 밝고, 덜 머러저리스럽다. 아, 물론 술을 안 마셨을때에 한해서. 술이 들어가면 젊은 혈기만큼이나 시리즈 전체를 아울러 가장 머저리스러움을 보여준다.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들일수록 캐릭터의 성격이나 전체적인 완성도가 붕괴되는 경향이 있는데 해리 홀레 시리즈 역시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해리가 박쥐에서 자신이 과거를 털어놓으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면 최근 시리즈에선 아예 호주에서 사귄 여자친구에 대한 후회라던가, 박쥐에서 밝힌 본인으로 인해 사망한 동료에 대한 죄책감 등은 한번도 표출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게 삭제되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그래서 박쥐를 읽으며 해리에게 몹시 실망했다. 아마 이런 것이 시리즈를 역순으로 읽는 부작용 중 하나인것 같으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역주행 할수록 해리에 대한 실망감이 쌓여가는게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평생을 애도하며 죄책감만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모든 계기가 된 술을 끊을 수는 있는게 사람 아닌가. 해리는 맨날 알콜중독 유전자 탓만 하는데 프리퀄까지 읽은 이상 이제는 그냥 핑계로만 들릴 뿐이다. 노르웨이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리 홀레, 이쯤 되면 중2암 말기가 틀림없다.
나는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털어 등장한 여성 캐릭터 중 이 책에 해리의 여자친구로 등장한 비르기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용감한 그녀가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계속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해리와 함께 점점 성장하며 해리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의 퇴장이 참 아쉬웠다. 파란 눈의 붉은 머리칼을 지닌 비르기타를 상상할 때면 디즈니의 인어공주 에리얼이 생각나 그녀가 더 마음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수족관으로 바다를 꿈꾸며 사랑하던 그녀가 자신의 사랑인 해리를 위해 다 내던진 것까지, 그녀는 인어공주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진짜 인어공주가 아니듯 해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왕자님이 아니었기에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였으니 안타까웠다. 비르기타 외에도 박쥐에서 해리의 가장 큰 조력자였던 앤드류나 레비도 인상 깊었다. 그 둘의 모습에 북유럽의 시니컬함을 더하면 현재 해리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아, 앤드류가 그렇게 가버리고 해리가 울어버리는 순간만큼은 해리가 짠했다.
박쥐의 바로 다음 작품 레드브레스트에서도 알 수 있지만 요 네스뵈는 역사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두 작품 모두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호주와 노르웨이의 역사적 배경을 사건의 주요원인이자 갈등요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레드브레스트 이후 요 네스뵈는 한참의 고민 끝에 본인이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하드보일드이자 스릴러 쪽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재 시리즈의 모습으로 굳혔다고 하는데 만약 처음 요 네스뵈의 의도대로 시리즈가 쓰여졌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랬다면 현대판 인디아나 존스 같은 시리즈가 됐으려나. 요 네스뵈의 이야기꾼 기질이라면 잘 맞아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시리즈도 기대하며 해리 홀레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오길 바래본다. 하지만 안 그럴거라는거 안다. 짱구아빠는 발꼬랑내가 나야 제맛이듯, 해리 홀레도 알콜 중독이여야 제맛일테니까. 이쯤되면 중독된게 해리인지 나인지 헷갈릴 정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