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는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과 우주 관련 다큐를 즐겨보셨다. 그 시간이 되면 마치 만화영화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처럼 습관적으로 틀어놓고 일을 보시거나 신문을 보셨다. 프로에 집중할 때에도, 다른 일을 보실 때에도, 티브이에는 늘 자연을 다룬 다큐는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게 싫었다. 동물에 관심은 있었지만 매번 챙겨 볼 때까지 관심이 생기진 않았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곤충 관련 다큐를 유튜브로 즐겨본다는 점. 소파나 침대에 누워서 할 일이 없으면 곤충과 관련된 다큐를 본다. 요즘은 편집이 잘 돼 있어서 10분 내외로 짧게 볼 수 있다. 마냥 미물이라고 생각한 곤충들인데,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에서 배우는 점도 많았다. 고등생물인 인간이라고 해서 미물보다 나은 것도 없어 보이고, 효율적으로 진화한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레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영상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 공영 교육방송 중 하나인 EBS의 소중함이다.
EBS. 나와 같은 수능세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교육방송이다. 수험 때부터 참 많이 접했던 방송이다. 인강을 비롯하여 문제집 등등 EBS에서 나온 것들을 많이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보고 있는 유튜브 곤충 다큐의 대부분은 EBS다. 영상을 보면서 이렇게 세심하게 촬영할 수 있는 것에 놀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상의 퀄리티가 몇 년 전에 나온 것임에도 디테일이 놀랍다. 나의 세금과 돈이 이런 공영방송에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학창 시절 때에도, 최근에 자연 다큐를 보면서도 매번 감사한 마음을 느끼는 EBS. 그러나 가장 고마웠던 순간은 돈에 관한 개념도 EBS를 통해 배웠다는 점이다. 전업투자를 시작하고 방황에 방황을 거듭할 때, 정신적인 턴어라운드가 됐던 기폭제 중 하나는 EBS였다. 더 정확히 꼬집어보자면 'EBS 자본주의'라는 다큐프라임 프로그램이었다. 다큐를 보면서 돈에 대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있게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도 투자에 도움 되는 책을 알려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추천하는 책이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돈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 돈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돈으로 형성된 자본주의 체제는 어떤 속성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는다. 그냥 막연하게 돈이 많으면 좋을 것이다.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으로 투자를 하거나 재테크를 시작한다. 돈을 버는 데 있어, 돈에 대한 상세한 내역은 필요 없는 지식일 수도 있다. 단순히 돈만 버는 기술만 익히면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기능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나 역시 그랬었다. 물론 그렇게 돈을 버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돈에 대한 천재적인 육감이 발달하지 않았다. 평범했고 그렇기에 돈에 대해서 공부가 필요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존하고 싶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부분들을 이해하고 알고 나서야 돈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벌고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생겼던 것 같다. 이런 관점을 만들어주는 데 있어 'EBS의 다큐프라임' 자본주의는 커다란 도움을 줬다.
최근 희소식이 들렸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를 이어 돈에 관련된 또 다른 다큐 프로그램이 제작됐다고 한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EBS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이다. 다큐를 엮은 단행본도 출간됐다. 기쁜 마음에 책을 구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연휴 동안 여유롭게 프로그램을 정주행 할 계획이며, 책도 빠르게 완독하고 이렇게 서평을 남긴다. 모든 작품에서 제목은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다. 금융을 똑같이 다룬 다큐더라도 '자본주의'와 '돈의 얼굴'은 분명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체제에 중심을 두고 있고, 하나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둘 다 겹치는 내용은 분명 있다. 돈의 생성과 역사, 인플레이션에 대한 내용, 자본주의에 대한 한계와 대안, 위기가 있어도 극복할 수 있는 탄력적인 시스템 등등... 차이점도 있다. '자본주의'의 내용이 소비와 금융상품, 그리고 경제체제의 역사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의 거시적인 부분을 다룬다면 '돈의 얼굴'은 돈에 관한 내용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면서,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돈의 얼굴'이 '자본주의'보다 훨씬 좋았다. 주제에 대한 집중과 내용에 대한 일관성과 명료함이 돋보인다.
화폐와 돈에서 가장 중요한 속성은 바로 신뢰다. 화폐의 신뢰는 리스크의 여부를 결정하고, 신뢰와 리스크가 조율이 된 것이 금리(이자)다. 환율은 나라 간의 화폐의 신뢰도를 의미한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빚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신뢰도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암호화폐와 금이 시세를 분출하는 이유는 기축통화를 비롯한 제도권 통화의 신뢰가 잃고 있다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며, 돈을 이용한 투자 역시 비합리적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과정에서 성과가 난다. 책을 보면서 화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신뢰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돈에 여러 얼굴들을 조명할 수 있었다. 전작인 '자본주의'에서 구성과 체계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던 부분과 대조적이다.
와이프랑도 이야기한다. 이런 내용들은 투자와 관련 없이 자본주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라고. 돈의 속성을 이해해야지 숫자로 표현된 명목소득에서 벗어나 인플레이션에 가려진 실질소득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다. 돈의 여러 가지 얼굴들,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금리(이자)와 빚에 대하여, 물가와 돈의 상관관계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암호화폐와 투자에 이르기까지, 돈에 대한 다양한 얼굴들을 책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나의 기준에서 좋은 책을 선별하는 기준은 내용에 핵심이 담겨있으며 명료하고 구체적이며 양이 짧아야 한다. 어렵지 않고 쉽게 썼다면 더더욱 좋다. 그런 점에서 《EBS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은 나의 기준을 충족하는 좋은 책,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투자자 아니 대한민국을 사는 모든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생존 지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돈의 얼굴', 둘 중 하나만 택하라면 당연 후자다. 물론 여유가 된다면 둘 다 읽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읽은 뒤, 와이프의 침대에 조심스럽게 책을 가져다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