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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루프 : 금융 3000년 무엇이 반복되는가
  • 이희동
  • 22,500원 (10%1,250)
  •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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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로운 학문을 접근할 때 효율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은 역사를 훑어보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움를 갈구하고 추구하지만,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진보보다는 보수적인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다. 역사가 효용성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보수적인 습성 때문이다. 고대 로마시대와 현대의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을까? 생활 양식 등 외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음이나 심리, 태도 등등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한치의 변함이 없다. 역사의 기록은 이런 불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노골적으로 추려보면 두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는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 또 하나는 좋은 것을 본받기 위해. 경제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다. 시장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퇴출되지 않는다면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나쁜 것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소리다.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퇴출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폭탄을 피하는 법은 시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큰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 궁금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잘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럴수록 돈은 나와 멀어졌다. 오히려 버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하자는 집착을 버리고, 관조를 유지하기 시작하면서, 퇴출되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돈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지나온 금융의 행적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은 더더욱 굳어졌다.

나쁜 것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기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보통 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표와 데이터를 고려한다. 물론,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각종 데이터에서 신호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읽지 못한다. 우리보다 배웠다는 전문인도 별반 다를 바 없다. IMF가 터질 때, 외환보유고가 부족한 상태라는 사실을, 기업들의 채권이나 어음이 부실하다는 것을, 시장의 펀더멘탈과 가격의 괴리가 버블이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의 주인공 김혜수의 사례처럼, 위험이 터지지 않게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회의적이다. 위험요소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닥칠 위기를 바꾸긴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렇기에 결론을 단순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위기란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터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앞서 강조했던 부분이지만 금융에서 정확한 예측 따위는 필요 없다. 물론 예측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투자는 예측을 포함한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중요한 것은 핵심을 어디에다 두느냐다. 시나리오에서 예측의 비중을 높여버리면 투자의 난도가 높아진다. 그럼, 예측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이다.

시나리오는 반드시 틀렸을 때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이런 포인트로 투자를 집행하지만, 만약 내가 틀렸을 경우에는? 어쩔 것인가에 대한 대응법을 항상 생각해둬야 한다. 추가로 매수를 진행할지, 물량을 조금 덜어낼지, 다른 자산을 투자해야 할지 대응할 수 있는 부분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발자취는 나의 투자 시나리오에 확률 값을 높이는 부분에서 유용하다.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나리오에 부분적으로 확률 값을 높이는 부분에 활용하는 것이다. 예측이 아닌 대응의 확률 값을 높이기 위해서, 예측이 아닌 틀릴 수 있는 시나리오의 확률 값을 조금이라도 고려할 때 역사는 빛을 발휘한다.

금융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숱한 실수를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있다. 경제 위기는 반복되는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혼합되어 나타난다. 인간의 확증편향, 과도한 맹신, 탐욕과 이기심, 무너진 가치의 신뢰도, 투기적 성향의 부채의 급증, 통화의 급증과 가치 하락, 도덕적 해이,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실물 자산의 밸류와 가격의 괴리감, 금융의 컨트롤 타워인 중앙은행의 적절하지 못한 대처능력... 이 모든 것들이 반복적으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위기의 겉모습, 형태와 모양은 다르지만, 위기를 유발한 내부적인 트리거나 원인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례의 반복이다. 위기가 언제 터질지는 모른다. 악재 요소들을 언제 어느 시기에 반영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위기를 유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늘 생각해야 한다. 희망 속에서도 최악의 절망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의 절망은 희망의 정점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블랙스완이 다가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우려했던 부분을 시장이 반영하면서 좋지 않은 조짐이 하나둘씩 보일 때에는 탐욕을 줄이고, 자산을 조절하며,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에 열기에 거리를 두고 과열된 상황이더라도 언제든지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매매에 들어갈 때 지수가 -10% 정도 빠질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매매를 한다. 어느 순간에서 어떤 문제를 통하여 지수가 무너질 수 있음을, 무너졌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매매를 진행한다. 축제 속에서 언제든지 발을 뺄 상태를 고려하고 있는 셈이다. 너무 시니컬하고 부정적인 태도인가?

반대의 경우도 있다. 긍정적인 부분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확신을 했다. 고대에 거대한 제국들이 들어설 때마다 금융도 진화하기 시작한다. 중세의 암흑기에서는 종교에 가려진 뒷골목에서도, 군주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의회 중심으로 나아간 근세에서도 금융은 진화했다. 복식부기, 중앙은행의 등장, 환율의 개념, 신용에 대한 개념과 채권, 어음, 주식의 등장 등등... 위기도 반복됐다. 화폐의 가치 하락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막대한 제국을 내부적으로 무너트렸다. 거짓말처럼 망할 것 같지 않은 로마 제국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내부적인 경제 위기로 무너졌다. 중세의 종교집단도 겉으로는 고리대를 금기시했지만 뒤로는 이자 수익을 취했다. 군주들의 정복전쟁과 탐욕, 사치로 인한 무분별한 자금 융통과 파산은 당대의 유명한 민간은행을 몰락시켰고 유럽 대륙을 뒤흔들었다. 상품시장에서도 튤립을 비롯 주식의 버블 현상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금융의 진화와 진통을 겪으면서 커다란 제국이 몰락하고, 종교집단이 몰락했다. 군주들은 빚을 갚지 못하여 파산하고 나라 재정도 파탄 났다.

앞서 살핀 대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 제국, 문명들은 금융의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고 사라졌다. 그렇게 하나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지구상에 등장한 체제 중 가장 유연하다. 나라와 문명을 무너트린 금융위기가 오더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했다.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악재가 터지더라도 이를 수습하고 극복했다. 금융의 발자취를 읽으면서 느낀 가장 희망적인 부분. 자본주의의 말도 안 되는 유연성 앞에서 긍정과 믿음이라는 감정을 새삼스레 느꼈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겠지만 역사는 말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그렇기에 생존이 중요하다.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기회를 주는 것이 자본주의에 속성이다. 노련한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금융사에 대한 책은 많다. 에드워드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 러셀 내피어의 《베어마켓》, 금리의 역사를 다룬 최고의 책이자 벽돌인 《금리의 역사》, 사례 중심이 아니라 이론으로 풀어낸 켄 피셔의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등등... 유명하고 좋은 책은 많이 나와 있지만, 분량이 많고, 해외에서 나온 책이 대다수이기에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경우도 있다. 국내 저자들로 살펴볼 때에는 대중성을 갖춘 오건영이 쓴 《위기의 역사》와 같은 책이 있긴 하지만, 범위가 우리나라에 국한되었고, 풀어내는 방식도 매크로에 치중되어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해외의 명저들과 견줄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거시적인 금융사를 시대별로 조명하면서 금융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떤 발전과 쇠퇴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전문성과 대중적인 부분을 절묘하게 버무려냈다. 적절한 범위도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도 문체도 나의 기준에서는 합격이다.

경제 초짜가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내용이고, 정리가 힘들 수 있겠지만, 증권사 리포트를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분들이라면 정말로 유익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투자에 대한 기교나 기술보다 금융에 대한 근본 지식과 기초체력을 키우고 싶은 분들, 금융에 대한 시야를 한층 더 넓히고 싶은 분들 그리고 경제사에 지적인 유희를 즐기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명저를 만들어 준 출판사와 저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책 덕분에 연휴가 정말 풍성했다.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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