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포스팅을 오래 봐 온 사람들은 잘 아시겠지만 개인적으로 불교를 무척 좋아한다.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사상,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전반의 태도 등등이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가가 있을 때마다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힐링하곤 하는데, 운이 좋다면 스님들과 차담을 하면서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절밥도 얻어먹기도 했다. 절밥.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사찰의 공양은 무척 감사하며 기대되는 요소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육식을 금하고 채식 위주의 자연 친화적인 음식을 섭취한다. 나 역시 여느 현대인과 다르게 육식과 생선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찰에 공양을 접하는 계기로 채식에 대한 관점도 바뀌기 시작했다.
식사를 할 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한다. 음식이 갖은양념과 원재료가 어우러진 고유의 맛을 여유롭게 느끼는 점. 그것이야말로 식사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런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데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채식이다. 나물의 고유한 풍미를 느끼면서, 양념과 조화된 맛을 즐기고, 따로 반찬으로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나물 찬반을 모아서 장과 함께 비벼서 어우러진 맛을 느끼기도 한다. 육류나 생선도 맛있지만 언제부턴가 조금 먹다 보면 물리기도 하고 속이 불편하다. 그런데 채식은 많이 먹더라도 속이 편안하다. 그래서일까, 절밥을 먹는 날에는 역설적으로 나도 모르게 과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나물이나 채식을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강원도에서 자랐는데, 당시 외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 있었다. 산간지대인 강원도에서 지낸 할머니께서는 특유의 지역색 때문에 나물 찬반을 많이 해 주셨는데, 당시 여느 또래의 어린아이들처럼 인스턴트나 고기 음식을 안 준다고 반찬 투정을 엄청 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채식 반찬이야말로 최고의 보양식이고 건강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손맛이 좋은 할머니와 청정 강원도에서 나온 재철 나물이 만났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결혼을 하고 와이프가 해주는 밥상을 먹으면서 새삼스레 할머니의 나물 반찬이 생각날 때가 있다. (와이프의 손맛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조!!) 사찰의 공양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배경 배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식 전업 트레이딩 일을 하면서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집에서 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집에서 보내는 만큼 식생활에 더 신경을 쓸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이것저것 읽고 분석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외식,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식품, 밀키트 등등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 점심은 라면을 먹는 것이 일상화되었고, 하루를 마치면서 술을 먹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겠지만 전업 트레이딩 역시 몸이 건강해야 한다. 몸이 건강해야지 정신이 맑아지고 일도 오래오래 할 수 있다. 몸이 건강하려면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는데, 하나는 운동이고 하나는 식습관이다. 그중 식습관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영양제나 약물보다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 최고의 보약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한 접시의 음식이 내 앞에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먹는 음식은 자극적이고 먹으면 먹을수록 질린다. 조금만 먹어도 속이 불편하고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 돈의 가치와 인간의 편리 때문에 탄생한 간편 요리는 진심보다는 빠름만 담겨있다. 건강을 위해서, 진심이 담긴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오프라인 서점에서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요리 관련 신간을 둘러봤는데, 홍승 스님이 쓴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음식은 우리 삶에 전반적인 부분의 영향을 끼치므로 아무것이나 먹으면 안 된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실용서들을 볼 때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 가능성'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구체적이지 않고 실상에 써먹을 수 없다면 굳이 책을 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책은 우리가 평소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들, 가령 가지, 무, 버섯, 두부, 단호박 등등을 챕터로 하여 관련 요리들의 레시피를 짤막하게 제시하고 있다. 레시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리에 들어가는 양념을 제조하는 방법 등의 기본기도 서두에 설명하고 있다. 깔끔한 편집에 큼직한 판형도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반인들이 식재료를 바라보는 시각과 홍승 스님의 시각은 결이 달랐고, 그런 자연 친화적인 스님의 시각이 무척 와닿았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과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식 재료의 만남으로 완성된 사찰음식 레시피. 기교가 있지 않은 소박한 레시피로 채워져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오는 편리에 편승하여 작성된 레시피와는 결이 다르다. 이 책의 레시피만 있으면 굳이 사찰에 가지 않더라도 건강한 채식 밥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제철 식재료로 해보고 싶은 요리들이 많아졌다. 책과 함께 가지와 무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