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7년 만의 새 장편소설!
이것만으로도 광고가 되는 한국 문학의 고유명사, 소설가 은희경의 신작 소설 〈빛의 과거〉이다.
2017년을 사는 '나'는 40년간 만남을 유지해온 대학 시절 친구 희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의 대학 기숙사에서의 시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서로가 기억하는 그 시간은 너무 다르다.
예향의 도시라고 불리는 보수적인 지방 도시에서 살던 나는 '정숙, 노력, 순결'을 교훈으로 하는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여대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기숙사에서는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각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온 이십 대 초반의 여자 대학생들이 겪는 다름과 섞임이 생긴다.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28쪽)
스무 살은, 어릴 적부터 불조심, 새마을 운동 등등 복장 불량에 걸리지 않기 위해 무수히 습관처럼 왼쪽 가슴에 달던 그 리본으로 자발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는(70쪽) 걸 알게 되는 나이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자신의 의사대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여자는 적당히 남자의 비위를 맞출 만큼만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남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는 그것이 부당하고 이상해도 묻지 못한다. 기숙사의 사감은 기숙사 퇴사라는 강력한 벌칙으로 사생을 통제하고, 기숙사 오픈 하우스 날에 한 남자 대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인해 상관도 없는 두 여자 대학생의 삶의 방향이 엉뚱하게 틀어져 버려도 정작 그 사건의 당사자는 지나간 시절의 특별한 경험으로 그 시간을 기억할 뿐이다.
어쩌면 여고 시절 피하고 싶던 교련 시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는 지도 모르겠다.
국문학과 1학년인 나(김유경)는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심하지 않게 말을 더듬는 약점이 있다. 긴장하면 더 심해지기 때문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왔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112쪽)
말 더듬는 약점을 감추기 위해 내가 하는 노력은 가상할 정도이다.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181쪽)
하지만 희진의 필터를 통해 본 나의 모습은 문학소녀를 가장한 공주 그 자체이다.
연설을 잘하진 못하겠지만 사교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녀가 그 정도를 치명적 장애나 결핍이라도 되는 듯이 감추려 들고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장애와 결핍을 가까이에서 본 적 없는 그녀의 '공주다움'이었다.(189쪽)
소설의 화자인 나(김유경)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어느새 유경의 필터를 통해 바라본 세상에 공감하게 되는데 희진의 소설 속의 다른 시각을 통해 균형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받은 모멸감으로 인해 누군가에겐 중요했을 연락을 전해주지 않거나,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알면서도 사감에게 밀고하는 삐뚫어진 매몰찬 마음을 공감하기는 어렵다.
어느 해 가을인가 유난히 단풍의 색이 곱게 느껴졌다. 단풍이 이렇게 멋졌던가? 여기며 감탄을 거듭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봄에 지천으로 피는 꽃, 가을이면 곱게 물드는 단풍을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싶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보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마음은 주변의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사정을 헤아릴 여유도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각자의 '다름'은 이질감으로 느껴지고 제대로 '섞임'을 통해 각자의 다름을 개성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나의 결핍에 빗대어 인식되는 상대의 풍요로움은 미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제 어리다고 말하기엔 많은 시간을 통과해 온 지금의 '나'는 어떨까?
중심에서 벗어나 가장자리에 있을 때 전체가 더 잘 보이듯이 주변을 헤아리는 눈과 마음이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일부러 찾아서 읽고 보는 것은 아닌데, 공교롭게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그 당시의 자신을 쓰다듬고 토닥이는 이야기가 많다. 현재를 살아가며 무언가에 자꾸 턱턱 걸릴 때, 주저하고 발을 내딛지 못할 때 내 안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마주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내 안에 웅크린 어린 나를 만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시간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지나온 시간 속의 어린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일 거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빛의 과거 84쪽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빛의 과거 112쪽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빛의 과거 116~117쪽
"내가 소설 왜 쓰는 줄 아니?"
"설마 답을 맞히라는 거 아니지?"
"외로워서 그래. 그래서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편집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우겨서
내 편을 많이 만들려고 쓰는 거야."
빛의 과거 334쪽
* 빛의 과거 서평단에 선정되어 작성한 서평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