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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석님의 서재
  • 마음의 일
  • 재수.오은
  • 13,500원 (10%750)
  • 2020-12-14
  • : 1,53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하는 일

-재수x오은 그림 시집 『마음의 일』 클러버 서평 활동-

 

채현석(iddogee)

 

2020년의 2학기는 유독 나를 초조하게 하는 학기였다. 군 제대 후 첫 복학이었던 1학기의 의욕은 이미 한풀 꺾여 있었고, 이제 취업 준비를 마냥 ‘나중 일’로 외면하기엔 어느덧 졸업이 가깝게 다가온지라 학교 강의를 들으며 자격증 시험도 함께 준비해야 했다. 호기롭게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을 도전했지만, 시 수업의 과제 마감이 닥칠 때마다 스스로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시를 꾸역꾸역 제출해야 했다. 학기와 자격증 시험들을 겨우내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2020년은 2주가 채 남지 않은 날짜였다. 그 시점에 내 목표는 새해가 오기 전에 10일가량 전투적인 휴식을 취한 뒤에 새해가 되면 다시 영어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했다. 새해가 되자마자 토익 온라인 클래스를 등록했지만, 매 수업을 소화하기는커녕 체를 하는 느낌이었다. 중고등학교시절 다른 상은 몰라도 개근상은 꼬박꼬박 챙겼던 내가 수업조차 결석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주기로 했다.

연말의 나는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은 내 마음에도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내가 나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내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 혼자 디톡스를 해낸 느낌이랄까. 서평을 쓰려 해놓고 사담이 지나치게 길어졌는데, 『마음의 일』이 연말과 연초, 나의 소진과 회복을 도와준 책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마음의 일』이 태어나서 처음 읽게 된 ‘그림 시집’이었다. 나중에 검색을 해 보니, 두 달 정도 먼저 출간된 동명의 시집이 있었다. 출판사 서평을 읽어 보니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쪽은 그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림이 빠진 『마음의 일』은 아직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단언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시집은 그림과의 합이 아주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49면의 예와 아니요 사이를 고민하는 아이의 심정을 저울과 함께 표현한 부분이 탁월하다 느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는 결정들은 사실 스펙트럼에 가깝다. 하다못해 매일 먹는 점심 메뉴를 결정할 때에도, 심지어 가게를 정하고 들어가서 메뉴판을 구경할 때조차도 우리는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 뚝 잘라서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크게 나누어 예와 아니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저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한쪽을 골랐을 때 내가 감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느 만큼을 내가 감수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고민해낼 뿐이다. 이런 ‘마음의 일’, 즉 마음이 하는 일을 담고 있는 시집이 『마음의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김연수 소설가의 소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는 볼펜으로 선을 그어가며 우연히 만난 전처와 지나온 길들을 지도 위에 되짚어 보는 ‘나’가 나온다. 지도 위에 그어진 검은 선들은 “꼬불꼬불하면서도 때로는 이어질 수 없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행로로 남게” 되었고 ‘나’는 그 선들 가운데서 어떠한 인과관계를 찾아내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나는 ‘마음의 일’의 핵심이 이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의 일』 20면에서 “이렇게 방황하는 나의 궤적이 모이고 모여/또 하나의 문”이 되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일은 명쾌하고 매끈하게 인과관계로 단순히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우연과 방황을 생략하게 될 테니까. 『마음의 일』을 읽는 독자는 눈앞의 방황을 떠올리며 시집을 읽을 수도 있고, 이미 자신이 지나온 방황을 생각하며 당시를 재정의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마음의 일’을 함께 하는 시집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북마크.

 

“전도유망(前途有望)/앞으로 잘될 희망이 있다고 하려는 찰나,/판서하던 선생님의 분필이/필기하던 내 샤프심이/동시에 툭 끊어졌다/가슴에 잠깐/물결이 쳤는데/빗금이 그어지는 소리가/분명히 들렸는데/장래는 아직 멀고/ 희망은 어딘가/있을 것 같아/아무렇지 않은 척/잠시 후를 향해/초침처럼/살금살금/걸어갔다”(76-79면)

 

“rain과 rein처럼/헷갈리는 영단어를/나란히 쓴다/비와 고삐는/너무 멀다/모래와 모레가/서로를 모르는 것처럼/ (중략) 내 이름 밑에/밑줄 두 개를 긋는다/빗줄기처럼 한 번,/고삐처럼 또 한 번/나는 그 누구와도/대체될 수 없으니까/모래와 모레처럼/닮은 듯 보여도/전혀 다른 존재이니까/그런 이름들이/교실 안에 줄지어 있다” (200-2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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