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삼향천이라는 하천이 하나 흐르고 있다.
갈대도 볼 수 있고 오리들도 살고, 봄이면 벚꽃도 피고 유채꽃도 피고, 징검다리도 있고 메타세쿼이아 나무도 있고,
걷는 사람이 많아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다.
그런데 딱 하나 맘에 안드는게 바로 냄새@#$^$&*
탁트인 하늘과 푸르른 나무, 물 위를 거니는 왜가리 내지는 백로를 보며 감탄하는 들숨에 훅 끼치는 그 꾸릿함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어 나는 자주 삼향천을 찾아가 걸었다.
기다리는 영화는 예고편도 안찾아보는지라 흐린눈으로 이런저런 책 소개를 다 피해 받아든 오늘의 할 일,
표지를 펼치니 여기가 바로 삼향천이네 ㅋㅋ
아니 우리 동네 와서 보고 그리셨나...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예산과 주민의 안전(징검다리가 다 넙적네모남)을 고려한 도심의 하천은 다 비슷한 형태로 정비되어 있다. TV문학관의 '소나기' 의 주된 무대인 강의 징검다리는 정말 낭만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그곳은 이렇게 드럽지도 않겠지.
물가의 수풀과 징검다리, 백로와 오리들, 그리고 쓰레기...
단지 딱 하나 다른점은 그걸 건지는 어린이가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쓰레기를 건져올리는 어린이 앞 수면에 검은 봉다리가 스윽 떠오른다.
우리반 아이들은 사이다와 꼬북칩을 하천에 버린 x들을 흠씬 욕하다가
저 장면에서 초등학생특유의 억양으로 "으와~으와~ 저걸 저기다, 으아~ 저거 검정봉다리다 저거! 어떤x냐 진짜~"라며 흥분함.
그치그치 나도 너네 몰래 혼자 먼저 읽으면서 그 생각했어. 근데 그렇게 낚여야 다음장면의 충격이 더 커진단다. 잘 하고 있다 어린이들~
그렇게 건져 올린것은, 아니 사실은 스스로 나타난 것은 물 속에 사는 물귀신이었다.
아이는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다음장면에서 물귀신과 함께 수면에 파문을 남긴 채 사라지고
영화 타이틀 올라오듯 제목이 뜨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이 구조가 너무 좋다!
면지의 첫 장면에서 어린이가 쓰레기를 주울때, 멀리서 바라보다 점점 다가오던 백로는 아이가 물속에 끌려들어가자
기다렸다는듯 아이 가방을 훔쳐다 수풀에 숨긴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참 태연하게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니 이거 한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백로만큼이나 저만치서 바라보던 오리들은 흥미롭게 다가오다가 물귀신이 물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내빼듯이 멀리 가버린다. 흑막인가...
물귀신은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아이를 해달 엄마가 해달 아기를 안듯이 품에 안고,
입에는 초록색 빨대를 물려 어디론가 헤엄쳐 간다.
우리반 어린이 하나는 내가 저 페이지를 넘길때까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있었다고 한다.
공동묘지같은 물귀신의 본거지(?)에 도착했는데, 아니 세상에 여기에 다른 아이들의 사진이 9장이나 있다.
뭔데, 왜 이렇게 범죄소굴같은 느낌인건데,
물귀신에 잡혀오는동안 힘들어 보이던 어린이의 표정은 그새 적응했는지 여유롭다.
그런데 오늘의 어린이가 잡혀 오기를(?) 기다리던 물귀신의 반응이 참 인상적이다.
크-은키를 반이상 접어 아이와 눈을 마주친 뒤 이렇게 인사한다.
"반가워요, 오늘의 어린이.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어린이를 향한 정중함에 놀람.
아~ 그래서 제목이 오늘의 할 일이었군.
ㅋ잡아온ㅋ 어린이에게 물귀신 프로세스를 설명해주고 오염이 갈수록 심해져 일손이 부족하다고 전한다.
물귀신들이 손에 손을 잡고 입에서 초록 기운을 뿜으며 물을 정화하는 작업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
고된 노동에는 노동요가 빠질 수 없듯이 물귀신들은 "오늘도~ 맑은 물! 오늘도~ 맑은 물!"
우리반 어린이들은 물귀신들이 협동해서 일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한다. 더 재밌는것은 이 정화 시스템의 마지막은
물귀신들의 긴 머리채가 앞으로 모아 끝을 뾰족하게 만들면 고압수를 분출하는 소화전 주둥이처럼 깨끗한 물을 내보내는 분사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손에 손잡고 열심히 정화시킨 물을 내뿜기 위해 뿌듯한 표정으로 줄서서 기다리는 물귀신들이 대견한 순간이다. 인간이 마구 더럽힌 물을 이렇게 열심히 되살리고 있었다니.... 인간이 미안해....
여기까지 견학을 마친 어린이를 모은 두손에 앉혀놓고 오늘의 할 일을 보여주며 묻는다.
오늘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물귀신-
이정도면 물귀신 아니고 정말 물귀신 어르신. 물귀신 페스탈로치.
집에서도 밖에서도 어린이들을 키우는 나는 오늘의 어린이가 받는 이런 대우가 낯설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물귀신네 동네는 확실히 노키즈존은 아니로구만 ㅋㅋㅋㅋ 뭐든 맘대로 해댈 수 있을것 같은 물귀신이 어린이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묻네,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을 쓰네. 이렇게 묻는 어른에게 버릇없이 대답할 아이가 있을까? - 그렇다, 현실에서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가까운 어른에게 존중받는 경험을 해본적이 없는 어린이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너무나 길고 깊은 이야기가 되므로 패스. 아무튼 물귀신은 어린이를 참으로 존중한다.
그런데 왜 데려올때는 묻지 않았나 ㅋㅋㅋㅋㅋ 물가에 쭈그려 앉아 쓰레기를 건져올리는 것은 일종의 테스트인것인가? 선의를 가진 어린이를 알아보기 위한 물귀신들의 테스트인가보다.
역시나 어린이의 어떤 의사표현을 보여주지 않고 바로 어린이는 오늘의 할 일에 투입되어 작업을 시작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안되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할 아이라면 저래 쭈굴쳐 앉아 쓰레기를 줍지 않는다는 불문율과 같은...
교사경력이 쌓이면 역앞에 돗자리 깔고 앉아 관상을 볼 수 있다...는 썰이 떠오른다.
오늘의 어린이는 착실하게 아기 물귀신들 밥먹이고, 모빌 흔들어 잠 재워주고, 일귀신들의 휴식을 돕는다.
어휴...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지, 물을 깨끗하게 하느라 지친 물귀신들은 수질개선의 정수가 담긴 머리카락을 양동이에 담근 채 해먹에 누워 쉬고, 그보다 더 지친 일귀신들은 링겔을 맞고 있다. 니들이 정말 고생이 많구나. 하지만 힘들다 죽겠다 못해먹겠다 하는 일귀신은 하나도 없고 "고마워요." "힘이나요." "개운해." 한다. 반성한다 나 자신...
우리반 어린이들은 일귀신들 훈련돕는 장면을 좋아했는데 저희들도 점심시간이면 즐겨 이용하는 구름사다리를 머리카락힘으로 휙휙 건너가 착! 하고 착지 하기 때문이다.머리카락으로 데드리프트를 하는 일귀신들 중 한..명? 한... 마리? 는 바벨이 부족했는지 오늘의 어린이로 대신하고 있는 귀여운 디테일에 아주 자지러지게 웃는 귀여운 우리반 어린이들.
후진양성과 교육만이 살길임을 아는 멋진 물귀신들은 어린 물귀신들을 먹이고 재우고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재밌게 놀아주는것에도 엄청난 공을 들인다. 인력기차와 물귀신동력 바이킹까지 ㅋㅋㅋ 너무 재미있게 노니까 부럽다는 우리반 어린이들의 의견이 있었다.
일귀신들처럼 손에 손잡고 물정화의식 연습하는 장면에서는 떠내려가는 어린물귀신들을 보면서 1학기 생존수영할때 물에 떠서 스크럼 짜는 훈련했던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떠내려가면서 친구 머리채를 잡는 장면에서 또 자지러지게 웃고 ㅋㅋㅋ
그런데 그런 어린물귀신들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운 어른 물귀신. 난 가끔 어린이들에게 말로는 괜찮다면서도 표정은 그렇지 못할때가 있는데,
(사실 표정이 진심임) 이 어른 물귀신들의 마음은 한없이 깊다.
오늘의 어린이가 물고있는 빨대끝에서 나오는 뽀글뽀글 공기방울을 어린물귀신들이 줄서서 하나씩 받아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아가들이 공기방울로 모양을 만든다. 두번째 모양인 오리모양을 보고 어!! 저 오리는!!! 김동수 작가의 '잘가 안녕'과 '감기 걸린 날'을 좋아하는 우리반 어린이들은 그 오리 모양도 그냥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김동수 작가님은 오리를 정말 좋아하는것 같다며 이렇게 작품들끼리 연결되는 작은 고리를 발견함에 우리반 어린이들은 전율을 느낀듯 하다. 이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니. 너희 정말 많이 컸구나.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나날이 커진다.
이 일귀신들은 어린이만 존중하는것이 아니다. 노인도 공경하는 아름다운 물귀신들...
백발이 된 일귀신계의 왕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오늘의 어린이의 공을 치하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흰 사탕다발같은 것을 전해준다.
일귀신들과 아기물귀신들이 모두 나와 오늘의 어린이를 배웅해 주는데 고마워, 가지마, 다음에 또 와, 라고 말하는 어린 물귀신들이 너무 귀엽다는것이 우리반 어린이들의 의견. 늘 자기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어린이는 만약 오늘의 어린이가 일을 대충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봐온 일귀신들의 모습과 성품이라면, 어린이가 왜 대충하는지 궁금해 하고 먼저 물어봤을것이다. 어려운 점이 있나요, 뭘 도와줄까요? 하고. 결국에는 오늘의 할 일을 다 해낼 수 있게 도와줬을거라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물귀신 슬라이드를 이용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오늘의 어린이는 흠뻑 젖어 있다.
워~ 저 백로xx 저거 가방 훔쳐서 숨겨놓고 몰래 보고있는거 봐라? 역시 저거 흑막아냐??? 했는데....
물귀신이 물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가방을 끙차~ 들어올려 꺼내놓고 어린이에게 다가가 날갯짓으로 몸을 말려준다.
가방 매는 것도 도와준다. 물귀신이 떠나간 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어린이에게 날개를 펼쳐 같이 인사해준다.
우리반 어린이 왈, "어? 쟤 물귀신이랑 한 패 잖아?"
정리해보면, 백로와 오리가 물가에서 관찰하다가 쓰레기를 건지는 아이를 발견하면 물귀신을 부른다.
물귀신은 어린이를 데려가 도움을 요청하고 그 날을 할 일을 마치면 다시 아이를 데려다 준다.
백로는 물 속 세상에 일손을 도우러 떠난 아이의 물건을 잘 챙겨서 숨겨두었다가
아이가 돌아오면 물기를 말려주고 소지품을 챙겨주고 인사해주고 보내는 역할!
한 패 맞네....ㅋ
오늘의 어린이는 자기가 건진 쓰레기를 손에 쥐고 힘차게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끝.
백로의 사랑스러움에 반해 첫 면지와 마지막 장면을 몇번이고 오고 가다 발견한 특이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물 색이다.
처음 아이가 쓰레기를 건져올리던 물의 색과 물귀신을 돕고 돌아온 뒤의 물 색깔이 다르다.
처음에는 초록이 감도는 하늘색인데 마지막 물색깔을 초록끼가 사라진 파란빛이다.
우리반 아이들은 이 점을 말해주니 바로 녹조라떼 이야기를 꺼냈다. 물이 초록빛인건 비정상이고 더러움의 표시라고 생각한다길래
녹조가 왜 생기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주니 표정이 안좋다.
"그래서 물이 파래진거였어, 오늘의 어린이가 물귀신을 열심히 도와주고 와서 물이 다시 파래진거였어. 근데 너무 조금 변했다."
그래 그렇게 조금씩 밖에 못 바꿔.
그래서 한 어린이가 와서 몇날 며칠 도울 수 없는거야. 당장 달라질거라고 생각하면서 달려들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 할 수도 있어.
우리는 매일 그날의 할 일을 해내면서 조금씩 달라질 환경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거야.
환경문제를 이야기 하는것은 마치 초등학생때 친구와 함께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면 뭐할까? 를 이야기 하는 것처럼 먼 미래를 막연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당장 에너지 사용을 줄이지 않으면, 당장 수질 오염의 원인이 되는 여러 요인들을 멈추지 않으면 지구에 대재앙이 찾아온다는 무시무시한 말들은 노스트라다무스옹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직은 숨 쉴만 한데? 아직은 바다에 강물에 몸 담글만 한데? 하는 안일한 마음에 자꾸 다음으로 다음세대로 문제를 미루어 가는 나는 어른이가 아니라 미룬이가 되어 살고 있는데, '오늘의 할 일'의 물귀신들은 그저 그날 그날 눈 앞에 보이는 작은 것들을 해나가면 된다고 말해준다.
요즘 우리집 어린이들이 자주 들으며 즐거워 하는 노래가 있는데 나는 이 노래 가사가 그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미룬이인것 같아서다.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루지
그러다가 돼버렸지 미룬이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시작이 제일 즐겁던 어린이는
끝내는데만 급급한 어른이
되지도 못했지 나는 미룬이
널부러진 양말밭 건너
옷 걸린 숲을 지나서
설거지 동산의 향기를 모르는척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어
미룬걸 보는건 일단 미룰래
내일의 난 더 어른이니
나보다는 용기 있겠지
약해빠진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기 위해
동기부여 영상을 찾아 “나중에 볼 영상”에 저장해놔
더 이상은 못미뤄
지금이 그때야
이것만 보고 힘내서 시작할꺼야
라는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일단 치킨을 먹는 나는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루지
그러다가 돼버렸지 미룬이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시작이 제일 즐겁던 어린이는
끝내는데만 급급한 어른이
미룬이가 되지 맙시다!
오늘도! 맑은 물!
오늘의 할 일을 찾아 해나가며 조금씩 달라질 내일을 기대하는 어른이로 살아가자. 고 다짐하며 긴 서평을 마무리 해 봅니다. 아니 또 이렇게 끝내는데만 급급해서야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