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
{이 책은 장소에 대한 인문서에도, 공간과 건축에 관한 이론서에도, 소설과 에세이와 크리틱에도 미달할 것이다.}
한 명의 독자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뭐랄까 이 책은 보여주기 위해 다시 쓰여진 일기 같아요. 속되게 말하면 말없는 커플 유튜버의 브이로그 자막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사소한 인상들이 가득해서 그렇게 느낄지도요. 상상적 탐색을 담고 있다 (…) ‘픽션 에세이’의 연장에 있다고 했는데, 저는 계속 누군가의 고백으로 읽었습니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을 때면 책의 모든 내용이 글쓴이가 겪은 내용이 아닐까하는 오해에 더 쉽게 빠지곤 합니다. 그런 기분, 남의 내밀한 고백에 들러붙는 듯한 촉감이 좋아서 에세이를 읽는지도 모르죠. 만약 이게 진정 픽션이라면 누군가의 경험처럼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입니다.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제가 평소에 장소 위주의 사고를 안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나쳐왔던 공간들을 되새기게 됐고, 덕분에 잊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과 그 모든 순간들을 실은 하나도 잊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내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은 좀 달랐다. 그는 책의 물질성을 매우 존중해서 내가 책을 접거나 줄을 긋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각자의 책이 필요했다. (…) 그는 마치 빛의 프레임에 둘러싸인 것 같다. 그의 목덜미와 가장 가까운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테이블을 한쪽 벽에 붙였기 때문에 그와 나는 기역자로 앉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각도에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는 데 익숙해진다. (…) 책을 읽다가 그의 왼쪽 얼굴의 엷은 홍조나 희미한 미소나 순간적인 속눈썹의 깜빡임을 훔쳐보는 순간이 있다. 그가 더 이상 그 의자에 앉지 않게 되었을 때, 남겨진 그의 의자를 만져보면 그것은 마치 둔감한 애완동물처럼 나의 친밀함을 배반한다. (…) 그 의자에는 그에게만 들킨 고통스러운 열정이 남아 있다. 아주 먼 곳에 이 의자와 똑같은 한 쌍의 의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진다.}
이런 식입니다. 책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식이죠. 덕분에 이광호의 픽션에세이는 독자에게 와서 남이 거짓으로 써준 일기가 됩니다. 군산과 광주극장을 얘기하는 꼭지에선 함께 갔던 전주영화제가 떠올랐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서의 벤치는 과학관에서 신학관으로 넘어가는 캠퍼스 뒷길 벚나무 아래 벤치로 읽혔습니다.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하거나 문학 작품의 일부를 빌려와 펼쳐놓은 뒤에, 그 여백 - 잊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미치게 만드는 그 여백을 장소성에 대한 고찰로 흐릿하게 덧칠해 놓았으니 어떻게 개인적인 순간들로 읽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잊는 데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서점에서 펼쳐보고 구매한 것이 아니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과 형식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178페이지 짜리의 이 책을 불의의 습격처럼 깊숙하고 아프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온도차는 있지만 피에르 베르제의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베르제의 편지들은 그들의 수집품과 지인들로부터 출발한다면, 이광호의 에세이는 문학작품들과 장소들을 곱씹는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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