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가는 영아가 의문의 뇌 시술을 통해 욕망을 분출하며 자유를 찾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다. 시술은 자신이 청혼을 거절한 남자친구 수원과 막돼먹은 어린이집 원생의 약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엄마에게 권유를 받았는데, 그 둘 모두 시술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영아는 시술 덕에 본인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고 영아에게 의식적 선택을 강요하면서도 올바른 삶을 사는 줄 아는 착각과 허영에 가득찬 친구 은주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린다. 한편 영아에게 시술을 권유했던 그 둘은 호주에서 만나 불륜을 저지른 사이였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영아의 어린이집 골칫거리였던 바로 그 원생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영아는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빵칼로 남자친구의 목을 그어 버리려 하지만 무딘 빵칼은 남자친구의 목에 자국만 남길 뿐이었고, 남자친구는 해방된 영아를 바라본다.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노골적이긴 하지만 유쾌하고 통렬해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억압받고 사는 주변의 모든 이에게.
기사, 동참, 이모티콘. 컵라면보다 빠르게 해결 가능한 이 선의를 창조해 낸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이 아니라 네이버페이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P8
눈 감고 휴대전화를 덮으면 닿지 않을 타인의 불행에까지 도움을 주려 하는 여자를 어찌 피로하게 여긴다는 말이지? 어떻게 그런 괘씸한 생각이 가능하지? 근데 왜 나는 그 불순한 마음을 자꾸만 혀로 할짝대는 것이지?- P10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제법 많은 인간이 과거를 동경하게끔 설계되 었다는 걸 은주와 수원은 알고 있을까.- P10
우리는 폐지와 트로피 사이에서도 중용을 찾기보다는 둘 중 하나만을 치열하게 욕망하며 살아간다.
나는 더이상 불행한 쪽으로 치우치고 싶지 않았다.- P10
어설픈 위로는 안 받느니만 못하지만 살다 보면 필요없는 일들을 서로 용인해야 할 때가 있다. 나 또한 원장과 동일한 표정으로, 덩 빈 감정을 나눠주었다. 돌아서면 금방 휘발될 이 웃음은 너무 가벼웠다.- P17
하지만 지나치게 비싼 게 패착이었다. SNS 계정이라도 만들어 홍보해 보라고 조언할까 싶었지만, 서울과 가 까운 신도시라는 특징이 전부인 하나동까지 빵을 먹으러 올 소비자는 없겠지. 점입가경으로, 여자는 손님들어 게 살갑지 않았으며 갈수록 불친절하게 굴었다. 결국 나루터는 파리들의 비행 코스로 전락했다.- P20
얼마 전에 나루터 취재 차 방문했거든요. 하나동에 몇 없는 친환경 베이커리를 신문에 담고 싶다면서요. 기사 는 멋지게 실어줬지만 정작 입에 넣을 걸 고를 때에는 자기가 쓴 글보다 통장 잔고를 우선시한 사람이죠. 일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퇴근하면 정직해지는 겁니다."- P20
"혼자서 입안에 저질 재료를 넣는 회생은 감수해도, 남들에게 도둑질로 비난받는 일은 절대로 감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들은 겁이 많거든요."
"그건 그냥 도덕적이라는 뜻 아닌가요?"
"겁이 있어야 도덕을 지키죠."- P21
고맙다는 말만큼 무고한 거짓이 또 있을까.- P24
그러나 은주는 주장했다.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예술의 창의성을 호도하는 일이니 작가는 영구적 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11년 전의 죄를 광장에 효시하여 죽을 때까지 대대손손 온 사람들이 보게 만들어 붓을 다시 들지 못하게끔 해야 하는데 감히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돈까지 버니 얼마나 괘씸한가? 이렇듯 은주 의 주장에는 명백한 근거가 존재했고, 그래서 거침이 없었다.- P25
얕은 안쓰러움 속에는 영악한 흥미가 숨어 있었다.- P27
양극단 사이, 나의 세계에는 두 영역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흐릿한 요소들이 선명한 것들보다 더 많았다. 반면에 은주는 세상을 보다 명쾌한 시야로 인식하기에 오직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만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 혹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어떠한 분류가 자기 세상에 머물 권리를 박탈시켰다.- P28
아무리 봐도 입방체로 존재하는 타인이 스스로가 다면체 생물임을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때.- P28
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통장 잔고를 위해 그들이 열심히 지켜온 갖가지 선택지들이 병렬로 연결되고, ‘25마트 상품‘ 이라는 저질 제품으로 수렴하는 순간 최종적으로는 ‘무책임한 선택‘만 남는다.- P32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을까. 그가 착해서였다. 착한 사람을 거절하는 건 나쁜 자의 몫이고 손가락질받는 일이 니까. 그럼 왜 5년이나 견딘 걸까. 오래된 연인은 존재만으로도 나의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증명하는 수단이 됐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이 남자를 도구로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P36
여자의 가게는 오늘도 손님이 없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어둠도 없었다. 이 여자에게도 뭔가 가 결여됐다. 혹은 넘쳤거나.- P49
타인의 괴로운 삶을 관음하는 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P52
고역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삶은 그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안전하다는 기쁨이, 내 삶은 구질구질한 자들보다 곱절은 더 찬란하다는 안도가, 더러운 것들을 발로 짓뭉갤 때 느껴지는 짜릿함 이 폭죽처럼 터졌다.- P52
Schadenfreude. 남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
샤덴 프로이데+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그들의 불행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 일말의 책임 또한 없 었다. 그러니 그들의 불행은, 내게도 내 몫의 자유가 있다는 증명이었다.- P52
성인 인증과 실명 인증, 갖가지 인증의 망을 뚫고 나서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 쾌락에 젖어 사는 신세계인의 대열이 보였다. 그들은 방광의 숙명을 받아들인 유목민처럼 양지의 검열을 피하며 끊임없이 중심지를 옮겨 다 냈다. 이들은 뿌리가 없었기에 어떤 이방인도 배척하지 않았다. IP를 감춘 나를 동족으로 맞이했고, 인간이 상 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자료들을 선물로 보여주었다.
그 모든 자료에는 죽음을 폭력으로 재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추악한 쾌락은 오래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이다.- P55
타성에 젖은 눈으로 할인율과 원 플러스 원을 탐색하는 그들의 식탁은 저급하고 불량한 먹거리로 채워질 테지 만 통장 잔고만큼은 절약의 가호를 받아 성실히 자라겠지. 살뜰히 저축한 돈이 미래에 드높은 아파트 요람으 로 다시 태어나리라. 콘크리트빛 성취를 위해 그들은 기꺼이 현재의 이로움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과거, 정의감에 도취하고자 도덕적 소비를 한 나의 마음이 오히려 쾌락과 가까웠던 것일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정신적 만족만을 위해 선택한 것들은 단발성 기쁨이었을 뿐,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 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 P56
세계를 위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지조는 공공의 것이었다. 반면 내 팔뚝을 스치며 지나가는 저 무 수한 개미 떼의 행복은 지극히 사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독려하는 능동적 소비의 정점은 저들의 살 자체 였다.
25마트에 들어찬 소비사회의 먼지들을 보라.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소비한 높은 확률로 죄악이 됨에도 저들 이야말로 먼 미래의 승자고, 나보다 잘살 인간들이었다. 정신적 쾌락이 우월하다는 믿음에 따라 움직인 나의 미래란 수원과 결혼하여 구질구질한 삶을 사는 것이고
공공을 위하는 만족, 그것이 희생시키는 사적인 행복이야말로 도덕이라는 쾌락이 가진 양면이었다.- P56
평등 안에 불평등이 숨어 있다*는 조지 오웰의 함의는 틀리지 않았다.- P57
네가 환경오염에 계속 일조한다면 이제 눌러줄 수 없어. 조회 수도 안 올려줄 거야. 난 너를 위해서 얼마든지 유치해질 수 있어.- P58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 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한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 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나 또한 은주에게 그런 적이 되어주기로 했다.- P59
미치지 않았고 정신이 명징했지만, 모두가 나를 미친 여자로 정의할 가능성이 컸다.- P62
은주는 아직 몰랐다. 사랑만 봐서는 사랑을 모른다는 점을. 진정으로 사랑을 논하고 싶다면 은주는 지금 여기 에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봐야 마땅했다. 구정물이 존재해야만 호숫물이 맑다는 걸 알게 되듯 혐오가 이 세 상에서 맡은 역할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더러운 것들을 비난하면서 완성되니까.- P64
통제와 해방은 짝꿍이라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거든요. 뭐든지 균형이 존재해야만 극단으로도 치달아 볼 수도 있지요.- P75
여자는 완벽한 균형을 완성했다.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전시하여 어느 쪽으로도 인생을 내던지지 않았다. 배 먹과 도덕의 중앙에서 줄타기하는 인간은 흔치 않은데, 스스로를 통제하고 동시에 해방을 누린다는 이율배반 적인 상태를 완성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자유의 왕국이었다. 정문과 후문이 하나의 원통처럼 이어져 있어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하나, 따지고 보면 입출구를 나눌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다.- P76
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