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자신을 규정하고 어떤 말을 듣느냐에 스스로를 인식합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 삶을 저울질합니다. 자기계발의 공통점은 자기인식입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찾으라는 조언입니다. 그런데 조언이 쉬웠다면 누구나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찾는 과정은 무척 힘들고 어렵습니다. 오히려 타인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입니다. 이는 자유에 대한 책임과 게으름이 원인입니다. 그리고 중심에 생각의 부재라는 시대의 병폐가 뚜렷하게 각인됩니다.
AI가 가장 원하는 사회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알아서 움직이는 사회, 어쩌면 영원한 노스텔지어와 같은 환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을수록, 생각이 짧아질수록 공허와 허무, 무기력이 삶을 지배합니다. 편하다는 것은 노동의 대가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라는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생각이 사라진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현대사회는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를 벗어나면 무자비한 비판과 비난이 쏟아집니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까지 동원되어 자신과 다른 생각은 적으로 간주합니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을 통해 생각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묶여있던 그의 행적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해소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지 않았고 매 순간 일상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산은 주변의 모든 것과 삶의 행위를 기록했습니다. 500여권의 여유당전서와 230여권의 유학경전, 삶의 소회와 뜻이 담긴 시와 글 70편, 그리고 목민, 송사, 국방, 의약등 법규와 제도에 관한 책이 200여권입니다. 변변한 참고자료하나 구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다산의 방대한 저작은 스스로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는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식과 친우들을 위한 글쓰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산의 독서와 기록방법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독서는 다산이 자신을 다독이고 매몰찬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었습니다. 다산은 읽은 모든 책을 분류하고 해석하여 새로운 책으로 편찬합니다. 특히 그는 기록에 앞서 생각의 뼈대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공자의 인의예지를 학문의 근본으로 여겼고 인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배움을 실용으로 연결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펼쳐나갔습니다. 특히 백성을 다스리는 폐해를 줄이기 위한 지방관의 태도와 자세를 기록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다산의 독서가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체적으로 활용되었던 주요한 사례입니다.
‘생각의 뼈대를 세우고 지식의 주춧돌을 쌓는다.’ 다산은 책의 핵심을 가려 뽑아 기록하는 초서법과 책을 읽으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두는 질서법을 가장 효율적인 독서방법으로 추천합니다. 100여권의 책을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 한권으로 요약한다면 누구나 보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할 것입니다. 또한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자신의 의견을 기록합니다.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합니다. 특히 한 모서리를 들어 세 모서리를 뒤집는다는 공자의 거일반삼을 예로 들며 초서법을 통해 기록한 것을 모으고 새로운 학문의 틀을 잡아나갑니다.
본 책은 수십 년 동안 다산을 연구해온 조윤제님의 다산의 기록법이 소개되어있습니다. 저자는 기록법을 통해 다산의 마음을 다시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산은 왜 그토록 기록에 집중했을까요?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유배당한 처지와 자식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섞여있었을 것입니다. 다산의 방대한 저작은 후대에 널리 펼쳐집니다. 특히 본초를 비롯한 어려운 의학지식을 쉽게 풀이하여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알린 것은 다산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취입니다. 다산은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세상에 내보낸다는 지식의 근본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생각이 사라지고 지식이 편파적인 시대에 독서와 글쓰기,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산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자아를 인지합니다. 그런데 기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류투성입니다. 잘리고 끊어지며 심지어는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을 이어 붙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왜곡된 경험의 총체입니다. 믿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다수는 오류투성이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인식합니다. 우린 거의 모든 시간 자신의 기억을 진실이라 믿습니다. 기억 오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직업이 기록입니다. 기록은 감정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또한 사건의 개연성이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산은 삶을 저울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을 닦고 매 순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2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생각은 짧아지고 기록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록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글이란 마음의 깃발이니, 마음속에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