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는 종종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지만 김희자 박사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메일을 보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찾아보면서 느꼈던 복잡미묘한 감정에 대해서도 당연히 이야기하지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희자의 독일 유학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그녀가 독일로 떠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김희자박사가 메일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어쩌면 - P307
시간이, 무엇보다 힘이 센 시간이 할머니와의 기억을 빛바래게 했는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겨울이 되어서도 계속 일을 다녔다. 김치 공장에 가서 절인 배추에 소를 채워넣는 일을 하기도 하고 시에서 하는 공공 근로에나가기도 했다. 일 년 동안 할머니를 만나오면서 나는 할머니가 무엇하나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는 끌차를 끌고 시장에 가서 일주일 동안 먹을 채소를 사와 반찬을 만든 뒤 남김없이 딱 그만큼만 먹었다. 물건도 잘 사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있는 계모임은 예외여서, 그날이 되면 제일 좋은 옷을 챙겨 입고 머리도 예쁘게 꾸미고서 친구들을 만났고,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다 같이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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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할머니, 소리 내어 웃는 할머니, 화투 치는 할머니, 높에 가려고 봉고차에 올라타는 할머니, 정자에 앉아서 친구들의 말에귀기울이는 할머니, 끌차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가끔 돋보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읽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모습 중에서도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식탁 의자에 앉아서 한 손을 컵에 댄채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때로는몇 초에서 길게는 일이 분 정도 할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돌아와서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감각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마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프리 다이버처럼 유유히 다시 이곳으로 돌아- P308
작은방 구석에 이불을 개켜놓는 자리가 있었다. 언니는 그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달리면서도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이웃들에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나에게는 생생했다. 사람들은 네다섯 살의 기억이 그토록 구체적일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그 강한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도모른다. 나는 절박하게 기억했다.
"지연이 네가 정연이를 많이 좋아했었지. 정연이를 자랑스러워했어. 사람들은 네가 너무 어려서 뭘 모를 거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말을 오래 기다려 왔다고생각했다.
"정연이는 미선이를 많이 닮았었잖아. 생긴 거며 말하는 거며 밥먹는 모습이며."
정말 그랬다. 언니는 판에 박은 듯이 엄마를 닮았었다. 웃을 때면반달 모양이 되는 눈이 그랬고 좁은 이마가 그랬다. 그런 언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