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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의나날님의 서재
  • 기억해줘
  • 임경선
  • 10,800원 (10%600)
  • 2014-10-20
  • : 912
여행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읽었던 것은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서른 다섯 소년 p16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해인은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어린 소년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창밖 풍경은 그의 마음을 가지고 곧잘 장난을 쳤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이륙하면서 몸이 붕 뜰때면 마음이 잘게 분해되는 것처럼 아렸다. 자신이 떠나온 장소들이 어느덧 장난감 마을처럼 작게 보이면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고민하던 일들이 너무 바보 같고 하찮게 느껴져 마음이 허전하고 시큰거렸다. 하얀 뭉개구름 사이를 둥실둥실 뚫고 지날 때면 어린 아기의 낮잠과 같은 평화속에 마음은 다시 보들보들해졌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도 있었지만 눈부신 오렌지 빛이 나타나면 천공의 밤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해인은 뭉클한 감상이 더 밀려오기 전에 비행기 창문 가리개를 내리고 갈색 안경테 뒤의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장 비상등이 일제히 꺼진 비행기 안은 이제 아늑한 어둠과 고요에 휩싸였다. 건조한 공기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얇은 모직 담요로 몸을 빈틈없이 덮으려고 뒤척이는 소리만 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을 청했다. 맨 앞줄 중간 자리에서 칭얼대던 갓난아기도 아직 한참 남은 비행시간을 눈치채고 체념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해인은 어두컴컴해진 비행기 안에서 개인 조명 버튼을 누르고 좌석 주머니에서 잡지를 꺼내 펼쳤다. 그는 탈것들에 비치된 자기 주장이 겸손한 간행물들이 마음에 들었다. 놔두고 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오로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잡지들. 페루의 산간 지역에서 알래스카의 어촌마을,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거쳐 불쑥 항공기 운항 정보와 기내 상영영화 줄거리, 비상시 대피요령 안내 페이지를 견뎌내야만 어딘가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한명에 불과함을 실감했다.

빨단 스웨터를 입은 학생 P20
인생의 패배자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던 아버지의 일침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해안의 귓가에는 종일 그 구절만이 고장 난 기계처럼
불길하게 반복됐다. 그는 세상의 모든 농담이 농담으로 끝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P 140

차라리 멀리 살면서 그를 못보는 것이 덜 고통스러웠다. 물리적 거리가 그리움을 키워줄테고 기다림은 반드시 보상을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여자를 바보 취급하지만 그것은 인내해 본적 없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P156

이 계단에 앉아있노라면 세상은 크게 변할일이 없고,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고, 내일이 오면 조금더 힘을 낼수 있을것 같았다 p173

잠시 책을 덮고 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호흡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단순한 기차여행이라해도 새로운
장소로 데려다준다는 것은 우리안의 무언가를 바꾸는 모험이다 p188

아직도 어머니 많이 원망하고 있니?
˝한때는 그랬지 . 하지만 이젠 아냐. 스무살이 넘어서 독립하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부모 탓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그때부터는 각자의 삶을 알아서 잘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내가 지금 행복하지 못한걸 부모 탓으로만 돌리면서 합리화한다면 그건 어리광에 지나지 않아. 설령 우리가 한때 부모님에게 무시못할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야. 억울하잖아. 앞으로의 내 인생이, 내 젊음이 평생 그 그늘에서 못 벗어나서 시들어 가는거. P193

인기척 없는 한겨울의 교실 풍경은 호젓하다 못해 냉기로 가득했지만 해인은 한때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그 시절은 결코 다시 돌아올수 없지만 형체없는 기억으로 몸 안에 차곡차곡 각인되어있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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