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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의나날님의 서재
  • 실내인간
  • 이석원
  • 10,800원 (10%600)
  • 2013-08-08
  • : 2,719

그래서 사람의 일생이란 어린시절의 상처를 평생동안 치유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지도 모르죠. 나는 그날에야 비로소 그의 유난한 경쟁심을 약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면 너에게 슬픔을 준 사람에 관한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후… 모르겠어요. 어디서부터 이야길 해야 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그의 리드가 자연스러워서, 나는 곧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맨 마지막날 이야기를 하죠. 우린 칠 년을 만났는데 작년10월 새벽에 그애한테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냈어요. 알아요. 문자로 이별 통보하는 거 별로라는 거. 하지만 여름에도 한번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애가 잡은 뒤로는 더는 얼굴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우리 이제 그만하자. 부탁이니까 연락하지 말아줘.

"하지만 연락이 왔고, 나는 또 그애가 나오라는 대로 나갔고, 평소와똑같이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보내다 마지막으로 늘 가던 성산동의 카페에 가서, 저는 말했어요. ‘너는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제 내 말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믿지 않고 나를 존중하지도 않는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다시는 보지 못한대도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던 거죠."

똑딱똑딱, 마루에 걸린 해바라기 모양의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언젠가, 내가 처음 독립하느라 방을 구할 때 그애가 신물로 사준 것이었다.

그러곤 끝이었어요. 마지막 코스로 그애를 반포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지 부르라고 말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않았으니까. 그리고 왜 그랬는지 전 그다음날, 헤어지기 위해 갔던 카페에 혼자 다시 갔고 그때부터 그애가 늘 즐겨 먹던 자몽타르트를 먹고 재스민티를 마시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어느새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졌다. 

근데요, 전 아직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저 엄청 병신 같죠. 근데 정말 궁금해요. 이유라도 알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는데 마지막 만났을 때도 두 시간 동안 떠든 건 나였지 그애는 아니었거든요.

그는 어느새 담배를 피우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트리에 걸린 전구가 따뜻하게 반짝였고, 거실엔 라디오 소리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아무하고도 하지 않았어?"
"네?"
"여자랑 안 잤냐고."
"상대가 있어야 하죠."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색해하는 나를 보며 그는 한일자로 입을 한번 굳게 다물어 보이더니 말을 시작했다.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다른 사람과 하는 첫번째 섹스에서 사람은 아득한 슬픔을 느끼지. 난 삼 년 전에 이별을 했거든
좋아했어, 정말 많이, 그런데 헤어졌어,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다해도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야. 난 내 몸 위에 포개져 벗은 몸을 보면서도 그녀와 내가 왜 헤어졌어야 했는가를 생갔했었지,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고 할까? 난 궁금했어, 이 낯선 여자와 내가 왜 한 침대에 있는 거지? 
 난 궁금했어, 도대체 왜 이런거지? 왜 넌 날 이렇게 내버려두는 거지? 난 그 여자와 더이상 할 수가 없었어. 내 몸에 닿는 누군가의 살이 마치 돌덩이 같았지.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고는 다시 옷을 입었어, 여자는 당황해서 화가 났냐고 물어보더군, 아니, 왜 화가 나겠어 난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고. 이번엔 내가 듣고만 있었다. 

"90년도말이던가, 중학교 삼학년 때 헤어졌던 첫사랑 여자애를 그놈의 아이러브스쿨 때문에 무려 십오 년 만에 다시 만나 그토록 궁금했던 나를 차버린 이유를 물어봤지. 그랬더니 뭐랬는지 알아?"

그는 허탈한 듯 우유갑을 접어 만든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며 말했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갔는데 자기는 비인문계를 가게 돼서 자격지심 때문에 그랬다는 거야. 세상에! 난 그때까지 틀림없이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십오 년 만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얘길 하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사람이 누굴 좋아하고 헤어지는 데 이유라는 게 그렇게 부질없는 거더라고. 그러니 누굴 어떻게만나든 아, 우린 그냥 만날 수밖에 없어서 만났구나, 그러다 헤어져도,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헤어졌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이유 같은 거 백날 고민해봤자 헤어졌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새벽 한시, 라디오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여자 재즈가수가 〈섬웨어 오버더레인보우>를 처연히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워리가 잠결에 일어나브레드 시리얼을 부스럭거리며 먹는 모습을 말없이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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