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전漁箭이나 곽세藿稅, 선세船稅 등이 모두 중앙 재정으로 귀속되었다. 어염세는 그동안 궁방 등에서 폭리를 취해온 과중한 세금을 저율 과세로 바꾼다는 명목하에 수세권을 조정으로 귀속시켜서 만들어냈다. 이 역시 유형원이 소개하고 정약용이 보완책을 제시한 특수세 항목이다.- P259
셋째, 선무군관포를 정책화하였다. 부유한 양인 계층으로서 양반을 모칭하여 피역하고 있던 이들을 찾아내서 선무군관 선발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수세 대상에 편입시키는 정책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취재取才를 통해서 군관이 되면 자연히 중서층中庶層으로 인정받고 면세 혜택도 받았다. 조정은 설령 이들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양인으로 되돌리지 않았다. 세금도 본래 양인이 부담하던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조정은 시험 통과나 납세의 방법으로 새로이 성장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해주었다.- P259
균역법이 타결되자 영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성을 위해서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의 자리에 있어도 독부獨夫(혁명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격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맹자의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탕평군주가 대경장의 중심에 섰다.
더욱이 그는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군주는 백성에 의지하며", "백성과 나라가 서로 의지하고", "군주와 백성도 서로 의지한다"고 하여, 백성을 한갓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왕정의 동반자로 재설정하였다. 국왕은 "한평생 민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왔다"고 술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른바 ‘민국‘은 장기간 추진된 대경장의 여파로 점차 정치 개념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의 재정 개혁은 15-16세기 경제변동인 금납화 현상으로 촉발되었다. 17세기 전쟁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위기 상황에 대한 조정의 능동적인 대응책이 바로 대동법으로 나타났다. 대동법의 발효로 화폐와 환곡이 세제 변동과 연동됨으로써 조선 전기와 구별되는 후기의 경제체계로 한층 진일보하였다. 더욱이 18세기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균역법까지 타결됨으로써 중앙 재정은 온전히 통합되고 국가 총예산의 운영이 가능해졌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 양상은 공시인이나 공노비 등과 같은 사회신분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백성관의 재인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 이래 실학 담론에서는 조정이 무능하여 재야 지식인의 정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억측해왔다. 그러나 사실 유형원이나 정약용의 개혁안은 조정의 정책과 상당한 연속선상에 있었다.-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