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가 조선시대에서 가장 평이 좋은 세종대나 정조대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은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설정하는 데두 임금이 가장 큰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식은 극우 사이트에서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신조어로 재등장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혐한嫌韓 표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른바 ‘진보 매체‘에서조차 일본 제국주의잔재라고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비판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이 용어를 무차별적으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와 진보 모두가 제국주의시대 잔재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 의식이 없다. 이는 사실 국망 직후 우리 지식인 사이에서 왕정에 대한 비판 의식이 ‘구체제‘ 혹은 ‘봉건 체제론‘으로 귀결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역시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을 악용하여 ‘조선망국론‘을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진보가 전자를, 친일 성향의 극우가 후자를 각기 계승한 것이다. 결국 양자가 모두 일본 제국의 조선 왕정 부정이라는 대전제를 용인한 셈이다.- P29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표현했는데, 그는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의식 내지 시대정신에서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가의 평가에 따라 역사가 좌우된다고 여겼다.
실례로 우리에게 익숙한 탕평군주蕩平君主 정조는 1980년대까지만해도 홍국영洪國榮(1748-1781)에게 조정당하는 우둔하고 바보 같은 허수아비 군주 내지 아버지(사도세자)를 잃은 가련한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일약 대성하여 정조대왕, 개혁군주, 절대계몽군주 등의 칭호가 붙여졌다. 정조의 삶은 한 번뿐이었으나 우리 사회가 급격한 정치 변동을 겪으면서 역사적 평가마저 바뀌어버렸다. 여기에는 민주화가 큰 시대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동일한 역사상이 ‘현재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카가 설명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