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여기에 이걸 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여기에다 이걸 써야겠다. 지금은 여름이고, 장마고,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앞의 두 문장 사이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어가 생략되어 있다. '굳이' 그러는 것이다. 접속어가 없어도 사람들은 접속어를 넣어서 읽게 마련이다.
그래서 굳이 나는 여기에 이걸 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왜냐하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럴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 소설이 굳이 '왜냐하면'을 삭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이 생략된 세계는 자연이다. 그래서 도시도 일종의 자연이다. 물론 시간도 자연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제목은 <자연의 자연>이다. 그들이 살았던 자연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저렇게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들이 다녔던 도서관에서 커피를 뽑아마시고 그들이 다녔던 학원을 지나치고 그들이 들렀던 헌책방에서 참고서를 사기도 했다. (나는 그 도서관과 학원과 헌책방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괄호 안에 넣어 말한다) 그들이 살았던 바로 그 시간에, 나는 그들이 지나간 그곳을 지나쳤다. 그 시공간은 특정한 시공간이다. 자연이 아니다. 아무리 자연인 척 해도 그 시공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그 시공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대구라고 쓴 건 굳이 대구를 생각하며 읽으라는 것이다. 굳이 대구라고 쓴 건 굳이 대구를 생각하며 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대구가 아닌 것에 대해 말하면서 굳이 대구에 관해 생각해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독자에게 부여하는 셈이다. 그 반대거나.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은 <자연의 자연>이 될 수 없다. 이 소설은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또한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요지부동 '왜냐하면'의 세계이고, 나는 그 '왜냐하면'에 대해서라면 제법 전문가다. 그럼 지금부터 그 '왜냐하면'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볼까.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을 굳이 리얼한 세계와 걸쳐놓을 필요가 있을까. 걸쳐놓는 데에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먹은 음식물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토할 필요가 있을까. 토할 것 같은 대구의 더위와 답답함과 친박 미용실 아줌마와 이문열과 장정일의 차이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다른 도시에 대해.
답은 물론 그럴 필요가 없다, 이다. '왜냐하면'을 걸치고 있을 필요가 없었고, '대구'를 걸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대구는 소설 속에 나오는 그대로 '단핵 집중형 공간 구조'로 계획된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부동산 투기의 파라다이스이자 대프리카 고담 등으로 불리는 가열차게 망해가고 있는 소비도시. 라고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 걸쳐만 놓아도 그렇게 읽는다.
더 쓸데없는 소리 쓰기 전에 서둘러 결론을 내리자면, <부자연스러운 비자연>에 대해 쓴 작가는 걸치는 데에 재주가 있다, 이다. 작가는 그걸 아이러니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무책임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