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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팜과루디
  • 도시의 시간
  • 박솔뫼
  • 12,600원 (10%700)
  • 2014-12-05
  • : 735

 

지금 19쪽을 읽고 있다. 18-19쪽에는 '준은 눈물과 우울, 슬픔 모두 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했다.'라는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세 번째 같은 문장을 읽고난 뒤 나는 깜짝 놀란다. 나는 이 소설을 최소한 세 번째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이 소설을 가방에 집어넣을 때마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오늘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여기까지 타이핑을 마치고 20쪽으로 넘어간다. 20쪽에는 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20쪽에서 '나'는 "어. 그러니까 저절로, 내일 또 그렇게 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되면 잊고 지내다가 한 달쯤 후에도 그렇게 되면 바람은 자주 나를 넣는 거잖아."라고 말한다.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내가 이 소설을 세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인가. 마치 바람이 '나'를 저절로 넣듯이 이 소설도 저절로 내 가방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를 저절로 집어넣는 바람 같은 것인가. 그러고도 다시 잊혀지는?

 

그래서 나는, 왜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18-19쪽의 이야기가 끝나는 4장까지만 읽기로 마음먹었다. 4장에는 바람과 비와 마음과 슬픔과 아득함과 기다림에 대한 '나'와 '우나'의 생각이 담겨 있다.'나'와 우나는 안다고, 바람과 슬픔과 우울과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4장까지만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다. 물론 끝까지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와 우나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이 느꼈을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걸 알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가만히 앉아 넋놓고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쓴 것이고(안 그런 소설가가 어디 있겠냐만), 그런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을 세 번째로 처음처럼 읽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 상태 때문인가 보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상태일 때 나는 이 소설을 읽었다. 그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고 읽으려고 책을 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덮게 될 것이다. 나는 왜 가만히 앉아 멍때리는 시간에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실을 잊는 걸까. 이게 참 희한한 일인데 내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경우는 어떤 부분을 다시 보고 싶어서거나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고 이 책을 읽었다는 기억조차 없는데 반복해서 읽고 있다.

 

마음을 추스리고 이 책이 내 가방 속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한번 따져보자. 사실 이 책을 가방 속에 넣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아주 작다. 그리고 제목이 아주 추상적이다. 작가의 이름도 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아직 안 읽었다!!!!! 내 책장에 있는 소설책 중에 안 읽은 건 이것밖에 없어! 라고 생각한다ㅜ 결국 제자리다. 문제는 책의 부피도 아니고 제목도 아니고 작가의 이름도 아니고 이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첫 장을 읽다가 졸려서 책을 덮었을 수도 있지. 그래서 마치 처음처럼 다시 읽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방금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잠시 5장이랑 6장을 살펴봤는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책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읽은 것이다. 아직 무서워서 더 살펴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다 읽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짓을 최소한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 내가 굳이 여기다 이걸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 제목이나 책의 모양이 마음에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다보면 아, 옛날에 읽었던 책이네, 이럴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돈 주고 산 책이고, 그것도 산 지 2년도 안 된 책이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2년 사이에 최소한 세 번째로 이 책을 마치 처음처럼 다시 읽고 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이럴 수는 없다, 이다. 이럴 수는 없다. 도저히, 납득이, 이해가, 이해하려 해도, 노력은 해보겠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이럴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다 읽어야겠다, 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비록 이 소설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어쩌면 다 읽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 대한 내 별점은 3점이고, 이 3점은 내가 최소한 이 소설을 세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주술 같은 것이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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