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코코팜과루디
  • 노을
  • 김원일
  • 12,600원 (10%700)
  • 1997-12-05
  • : 507

 

오늘은 뭐라도 하나 쓰는 게 좋겠다. 1978년 11월 10일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교학사 공무국에서 인쇄되었다. 김원일과 빨갱이와 문학과지성사와 교학사 공무국, 그리고 40년의 시간. 이 소설을 읽는 것은 40년의 세월을 읽는 것이구나.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소설은...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소설가는...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은 초판본 그대로 내 손에 쥐어져 있고 김원일은 또 아버지 이야기를 쓸 것이고, 세상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쓸 것이다. 오늘은 뭐라도 하나 쓰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오래된 게임을 한다. 전화기로도 하고 컴퓨터로도 한다.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싸면서도 한다. 오래된 게임을 하면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고 오래된 기억들은 변하지 않는 오래된 습관들을 재생시킨다. 그 기억과 습관들이 무언가를 다시 불러세우는데, 그 무엇이 무엇인고 따져보니, 예감이다. 반복되었던 것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예감.

 

수고스러움이 다시 수고스러움을 불러세울 것이다. 수치스러움은 수치스러움을, 경멸은 경멸을, 헛된 희망은 다시 헛되 희망을, 피는 다시 피를, 노을은 다시 노을을 불러세울 뿐이다. 피가 노을을 불러세우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고무신을 빌려주었다가 경찰에게 처형당했다. 어머니는 언젠가 시아버지에 대한 꿈 하나를 일러주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중소 한 마리가 끈에 묶인 채 수렁에 빠져 버둥거리는 꿈이었다. 어머니의 꿈 어디에도 시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내용은 없는데, 심지어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 소가 시아버지라 했다. 어머니는 그런 꿈을 자주 꿨고 얼마 전에는 내 꿈도 꿨다 했다. 불행한 내용이라 옮기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경찰이 고향 어디 구덩이에 던져 두었다고 했다. 무서워서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다. 1948년도의 일이다. 김삼조만 당한 일도 아니고 할아버지만 당한 일도 아니다. 1848년에는 흔한 일이다. 나는 분명 신나서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그때서야 내가 병신이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매품 책 하나를 노을과 함께 읽는다. 이 책 역시 오래된 이야기를 다룬다. 70년대 유신, 긴조와 문학운동. 수많은 선언문과 연명부와 강령과 고문과 조작과 민중과 민족과 국가. 이 책에 김원일은 없다. 있지만 없다. 김원일 아들의 이름이 있다. 자기 이름을 연명부에 기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을 올린다.

 

죽음,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던 김지하를 생각한다. 70년대 이미 굿판은 마련되어 있었다. 유신 긴조가 판이었고 예술의 민중화가 굿이었다. 그 굿판에서 죽음마저 예술화되었던 순간이 존재했고, 김지하도 그 굿판에서 살푸리 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굿판에서 살푸리하던 사람들은 어영부영 살아남았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죽었다. 과오가 있는 사람들, 연줄이 닿지 않는 사람들, 죽어도 소란스럽지 않을 사람들이 죽었다. 글로만 보면 그렇게 보인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고, 살아 있음에 이유는 없다. 그리고 누가 죽어야만 우리가 실은 우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원래 우리라는 것은 없구나, 없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진짜로 없구나, 우리가 나와 너를 수치스럽게 하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어쩌면 나와 너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환상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무덤 위에 교회가 세워지듯이.

 

아, 원래 이런 거 쓰려던 건 아닌데.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보수적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다. 오래된 게임을 하고, 김삼조가 불쌍해, 판 까는 놈이 있고, 그 판에서 먹히는 놈은 따로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오버워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김삼조가 불쌍한가. 김삼조가 이데올로그가 아니라서 불쌍한가. 김삼조는 이데올로그가 아닌데 죽어서 불쌍한가. 김삼조가 이데올로그였다면 김삼조는 한국문학사에서 문제적 개인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의 죽음은 순교가 된다. 깨닫지 못하고 죽으면 그 죽음은 허망한 것이 되고 남는 것은 이념의 허망함뿐이다. 전망은 삭제되고 '우리'를 불러세울 수도 없다. 그런 김삼조를 왜 만들어냈나? 그런 김삼조를 두고 다시 조민세를 만든 건 무엇 때문인가? 이데올로그로 만들면 무언가 달라지나? 없던 전망이 생기고 '우리들'이 조민세의 뒤를 따라 대오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나?

 

아닐 것이다. 수많은 죽음이 있고, 각각의 죽음은 그 죽은 자가 우리들이라 생각했던 각각의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깨닫게 할 뿐이다. 정말 우리'들'이었구나.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