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라는 이름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그래서 나나가 나오는 소설은 그냥 좋다. 그냥 소리만 들어도 좋은 말이 있는데 나나가 그렇다. 반면에 듣기만 해도 거북살스러운 이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졸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좆나 존나 졸라 이렇게 순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졸라면 좀 그렇지. 어쨌든 백년 좀 더 전에 이 거북살스러운 이름을 가졌던 프랑스 사람 에밀 졸라가 나나라는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나는 그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미 그 소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나나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나나가 누구라 하더라도 나는 아마 나나를 좋아했을 것이다(에밀 졸라의 나나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나나는 한자로 娜娜, 황정은의 나나도 娜娜, 나나는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졸리는 이름을 가진 한국소설가 한 사람은 난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썸남에게 자신을 나나라고 불러달라는 시덥잖은 에피소드가 나오는 단편을 쓴 적이 있다. 이 시덥잖은 에피소드 때문에 나는 그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거북살스러운 이름을 가진 고대 프랑스 소설가와 졸리는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현대 소설가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황정은 소설에 대해 생각하자는 것인데, 황정은의 소설에는 나나처럼 뭔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말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건데,
쌍년.
하고 생각했다.
쌍년.
하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
징그럽다는 말은 내가 들었지만 그 정도 호의를 보였다고 그렇게까지 말을 한 나나야말로 징그러운 사람, 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79-81>
이게 아닌가. 어쨌든 소라가 마음에 나직하게 내뱉는 쌍년 소리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처럼 반갑다. 원래 싸움이란 이렇게 내가 더 많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쪽이 진 거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나가 이겼네! 라고 기뻐하기에는 나는 아무래도 소라쪽인 것 같고, 하여간 소라가 불쌍하고 나나는 쌍년이다. 하지만 왠지 나나에게 미안하고 소라는 역시 교활하다. 이런 말들은 별로 의미가 없고, 사실 나는 계속 황정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황정은의 말들과 황정은이 만든 공간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추방된, 조금씩 껍데기가 되어 죽어가는 애자가 있는데, 애자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괴로워서 애자는 없는 셈 치고 싶지만 이 소설 속에는 계속 애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왠지 애자에 대해 말하자니 존댓말을 쓰고 싶어집니다. 애자가 말합니다.
불을 피우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고 보니 여자가 아궁이 속에 들어가 있더래. 빨간 불 속에서 여자의 표정이며 피부가 그토록 아름답더래. 아름답더래.
나는 그렇게 못해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
<84-85>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엄마나 어머니라기보다는 그냥 애자인 거지요. 애자라는 이름 자체가 뭔가 굉장하고 지긋지긋하고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니, 돌이킬 수 없다기보다는 더 이상 환원하거나 추상할 수 없는, 그러니까 그냥 애자로 존재한다고 쓸 수밖에 없는 상태가 바로 애자입니다. 그래서 그냥 無이고, 검은색이고, 블랙홀이고, 전체입니다. 이 블랙홀이 황정은이 만든 작은 공간 위를 둥둥 떠다니며,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들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조용히 한 덩어리가 되어 다 같이 죽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입니다. 나나는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서 나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원래 마음 먹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자, 처럼 자, 이제 아이를 낳자, 라고 한 뒤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자식을 낳는 존재는, 아마 신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이제 우리의 모양을 본 떠 사람을 만들자' 중동의 유목신이 했던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제 거의 신이 되었습니다. 기합을 넣은 뒤 한 번 낳아보자, 하고 단단히 각오해야 합니다. 황정은이 만든 세계도 사실상 신화의 세계입니다. 완전히 검은색이고, 블랙홀이고, 무이고, 전체인 그런 세계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신적인 의지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황정은의 말을 별로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 그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나나가 말합니다.
이것은 몇번째 태몽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줍은 듯 일렁이던 달을 생각하자 묘하게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구나, 생각합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이었구나. 여러개의 매듭이 묶이는 느낌. 가슴이 묶이고 마는 느낌.
<225>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지금 가슴이 미어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알 것 같습니다. 여러 개의 매듭이 심장을 묶는 느낌.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고 있다, 그러니 나나도, 황정은도 그 느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황정은도 믿을만하다... 자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건 거의 물리적인 통증에 가까워서 감정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렇게 육적으로 체득되는 감각은 추상화하거나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얻어맞을 때의 감각과 유사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감각은 초월적인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황정은의 나나는 아이에게 압도당한 겁니다. 아이로부터 감각되는 이 세계의 오랜 질서가 나나에게 각인된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말했던 졸라의 나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닙니다. 뭐 자연주의 소설이 대개 그러니까, 그냥 세계를 병균과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부패한 시체 같이 여겼던 시대니까, 인간의 몸이 사물처럼 해부되던 시대였으니까 그랬겠지요. 결국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기계론이든 휴머니즘이든 같은 매커니즘이니까요. 그냥 멈춘 지점이, 인물과 작가가 갈라서는 지점이 다른 것 뿐 아니겠습니까. 아직 조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