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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팜과루디
  • 호모도미난스
  • 장강명
  • 11,700원 (10%650)
  • 2014-10-29
  • : 287

 

이 책의 용도는 어젯밤 거실에 불을 끄고 책방에 들어선 순간 결정되었다. 조용하고 비가 오고 방문은 닫혀 있고 전등은 밝고 잠은 역시 안 오고 골치 아픈 생각은 하기 싫고 마음에는 서글픈 분노가 차오르고 책은 많고 안 읽은 책도 많고 만만해 보이는 제목의 책을 하나 읽어야겠고 뭐 그런 이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설에 초능력자가 등장하면 뭐랄까 만만하다고 할까 안심한다고 할까 그런 상태가 된다. 그런 존재가 있을 리도 없고 그런 존재를 열심히 구상하고 묘사하는 사람이 그런 존재를 믿을 리도 없고 그런 초능력이 은유하거나 비유하는 대상은 역시 너무나 익숙한 것이고 그 거리 역시 너무 가깝고 그래서 내가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고 그냥 따라가다가 마음에 드는 묘사나 인물이 있음 조금 생각해보는 정도다. 어쨌든 비가 오고 방문은 닫혀 있고 전등은 서글프게도 너무 밝고 잠은 빌어먹을 안 오고 쓸데없는 생각은 너무 많이 해서 골치 아프고 해결 안 되는 분노는 차근차근 쌓이고 케케묵은 책들과 신삥 책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섞여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고, 그래서 그냥 닥치고 읽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상한 맥거핀이 왜 이렇게 많나. 나는 그 머시냐 라오스 촌장 부하가 나중에 정말 거물 악당이 될 줄 알았다. 그는 지배 당하는 경험과 지배하는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지배와 피지배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인줄 알았다. 그래서 뭐라도 될 줄 알았더니 전두엽 절제술이나 당하고. 이렇게 되고 보니까 이 소설의 무수한 맥거핀은 전혀 맥거핀이 아니었고 그냥 작가가 감당할 수 없는 캐릭터의 세부를 실토하는 기능만 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추적추적 비가 오고 나는 오전부터 옛날 노래를 너무 많이 들은데다 커피를 이미 다 마셔버렸고 해가 지는데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분노는 차갑게 식어서 경멸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별점 두 개를 주려다가 문득 생각 났는데, 내 별점 두개가 이 책의 전체 평점을 지나치게 낮은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런 작은 평가가 작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보다 더 못한 책도 얼마든지 많은데, 내가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낮은 평점을 받게 되는 것은 좀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가자의 별점 부여 습관에 따라 조정 별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투덜이가 투덜대는 것은 그냥 상한 맥거핀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조정 별점으로 책을 평가할 만큼 책이 돈이 되는 시대가 올 리는 없기 때문에 앞에 쓴 건 그냥 미안한 척 하는 정도의 용도라 해두자. 아무리 사이버 네트워크 시대라 해도 이 정도 미덕은 나쁠 게 없으니.

 

책을 읽으면서 순수하게 감정이입한 장면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하루만에 잊어버렸다. 아마도 상실감, 죽음충동에 대한 묘사였던 것 같은데, 이게 이 책에서 나온 내용이었는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나온 것인지 헷깔린다. 어쨌든 이제 해도 졌고 집에 들어가야겠다. 거실에 불을 끄고 또 책방에 앉아 넋을 놓고 앉아 있겠지. 최악은 아니야. 그런데 최악이 아닌 것이 정말 최악인 경우도 있지.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10등 하는 것보다 9등 하는 것이 더 최악이니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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