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설은 어쩔 도리 없이 그것을 쓴 소설가의 것이겠지만, 값을 지불하고 책을 산 뒤 거추장스러운 띠지를 버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 독자는 어쩔 도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소설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소설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무언가 변하기는 변한다. 그 변화는 값을 지불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걸리적거리는 띠지를 떼어내는 순간일까.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일까. 결정적인 단어/문장/장면을 만나는 순간일까.
어떤 소설은 냉정하게, 어떤 소설은 실소를 흘리며, 어떤 소설은 착찹하게, 어떤 소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떤 소설은 허우적대며 읽게 되는데 이장욱의 소설은 허우적거리며 읽는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이장욱의 소설을 읽으며 허우적대는 것은 이장욱의 소설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인 것일까, 내가 허약체질이라서 그런 것일까. 나는 어쩌다 허약체질이 되어 버렸을까. 강인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서, 잘못된 도미노를 넘어뜨려서, 그런 것들을 들춰내는 것도 이제는 좀 지겹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을 곱씹는 것은 절반 이상의 나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내 그만두고 만다.
그러니까 이장욱 소설의 용도가 결정된 것은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다 읽고 난 다음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생각하며 쓰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오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지금 절반 이상씩은 자신이 아닌 것 아닌가, 하고 망연자실해지는 것이다. 하루오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이 세계에는 없는 존재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가 이 세계에서 조금씩 없는 존재들 아닌가. 그림에서 기어나온 아르놀피니도 그렇고, 입양아 알이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나올 정귀보의 평전도, 절간 앞에서 읽은 칠레의 세계도, 욕실생활자와 하마도, 소설 속에서 잠이 든 소설가도. 나를 규정하는 것들이 모두 허물어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고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살아간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소설을 사용하고 나면 이장욱은 내 마음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새겨진 이장욱의 이미지는 절반 이상의 이장욱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그 절반 만큼만 받아들이면 충분하다. 아마도 그 정도면 충분했던 것 아닐까.
모두가 절반 이상이 아닌 세상에서 전체를 말하라 한다면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장욱은 벙어리가 되지 않고 절반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절반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면 냉정함이 필요하다. 절반을 말하려면 낯선 것을 거두고 구차한 것을 견뎌야 한다. 이 교훈은 나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