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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팜과루디
  • 익사 (무선)
  • 오에 겐자부로
  • 13,500원 (10%750)
  • 2015-03-10
  • : 975

 

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소설가가 무슨 '생각'을 하며 늙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팽창하거나 늙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여전히 나는 더 가지기를 원하며 늙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은 오독이거나 아예 읽지 않은 자의 '생각'일 수밖에 없겠다. '죽음'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생각하도록 하고, 그럼 나머지 반에 대해 생각해볼까.

 

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자는 고향이 없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숲은 의심스럽고, 숲 속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공포스럽다. 숲은 시간에 의해 왜곡되어 있어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믿지 않을 때 '나'라는 존재의 역사는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에서 바라보는 숲은 항상 의심스러운, 딱 그 정도의 시공간이다. 도시는 가득 차 있다. 온갖 관계들과 힘과 소리와 색과 카페와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다. 숲 속에서 바라보면 도시는 거대한 아가리 같다. 아가리 속에 들어가면 똥이 된다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자는 숲과 도시의 경계 쯤에 이정표를 세우고 싶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의심스러운 곳으로 향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자, 나는 지금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똥이 될 것이다, 똥이 아닌 척 하자, 이정표를 보며 한숨을 쉰다.

 

이렇게 분리된 시공간을 바라보며 방황하다보면 숲과 도시의 경계에 눌러 앉아 거간꾼 노릇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가 가지기에는 썩 내키지 않고 남 주기는 아까운 그런 것을 이쪽저쪽으로 교환해주는 것이다. 오에의 소설이 그렇게 되고 만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은 아니고 오에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다. 여전히 나는 오에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지점부터 서사가 예상되기 시작하고,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하나하나 맞아들어가다 결정적인 파국이 맥빠지게 제시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냉정해진다. 똥이 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이 의심스러움, 오에의 말로 하면 '애매함'은 어떤 성취일 수 있을까. 숲과 도시, 근대와 전근대, 일본과 세계,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정상인, 식민지와 제국의 경계에 표식을 세우는 행위는 관계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주체나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못 되며, 현상 자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답을 찾으면 환멸만이 남는다. 소설에서 문제를 찾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환멸 쪽인 것 같다. 멋지게 해결하길 바랬는데, 그런 건 역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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