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위 포식자는 게으르다. 게으르나 사냥할 때는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김영하는 이를테면 한국소설판의 최상위 포식자다. 그러므로 게을러야 하며, 소설을 쓸 때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김영하는 게으른 것 같지도 않고 이 소설을 뛰어난 집중력으로 사냥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앞선 유비추리는 잘못 설계된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소설판은 먹이사슬로 계층화된 초원이 아니며, 소설 쓰는 것 또한 이야기감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아니면 김영하가 이미 퇴물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김영하를 생각하면 초원에서 멍때리는 사자가 연상되는 걸까. 이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소설을 읽다보면.
늙은 사자가 사냥감을 응시한다. 사냥감을 응시하는 사자를 초원의 각종 먹이들이 바라본다. 늙은 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각종 먹이들의 시선을 의식없이 의식한다.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감각한다고 해도 좋겠다. 사냥을 시작했지만 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사냥의 시작이라는 것을 사자도 알고 먹이들도 안다.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먹이들은 긴장한다. 먹이들이 긴장하는 순간 이미 사냥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자는 천천히 초원을 산책한다. 먹이들의 이름과 성별과 취향을 잠시 생각한다. 저 먹이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던 지난 시간을 조금 더 생각한다. 잠시 생각하다보면 초원의 끝에 닿는다.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다. 먹이들은 등 뒤에 있고 돌아본다는 것은 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되었고 사냥은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
반복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라니!). 반복은 완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반복은 기억이면서 망각. 인생은 최초의 기억을 상실해가는 것. 그러므로 기억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 반복하는 동안 상실하는 것. 이게 바로 인생이다! 뭐 어쩔래!! 소멸하는 방향에 놓인 이 소설은 그래서 늙은 사자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며, 지금 한국에서는 어쩌면 정말로 진짜 리얼리 (김영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리 김영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자꾸 이유는 알 수 없는데, 막 자꾸, 내가 이 글을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기보다, 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이나 소설가에게 진 것이 아니라 반복-완성-상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수긍 때문에 진 것 같다. 그게 그건가? 어쨌든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만, 나도 무언가를 꽤 많이 반복했고, 반복하며 소멸하는 것을 적잖이 목격했다. 그리고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이제 컴퓨터를 끄고 잠을 잘 것이다. 눈 뜨기 전까지 꿀잠 자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