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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12,600원 (10%700)
  • 2019-06-24
  • : 64,467


이 소설에서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어도 우리는 먼 우주에 갈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말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의 문제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에겐 주도권이 없다,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당연하지 않다.

사실은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고 있으니까(소설의 현실 얘기다. 안나와 현실의 관계).


그러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라 말하는 건 징후다.

물론 징후가 아니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 명백함조차 징후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이라는 징후.

'조차'라는 말. 

사실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나

현실의 냉혹함 때문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는가 여부와는 무관하게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그걸 인식한 후에야 '조차'가 등장한다.

우리와 현실의 명백한 분리. 현실로부터 버림받은 우리의 운명.


이게 징후다. 


무엇의 징후냐 하면, 소설의 운명을 드러내는 징후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와 현실을 구분짓는 용도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뜻. 

'조차'라고 말하는 건,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자의

포즈인데, 이건 사실이라기보다는 (근대)소설의 관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 생각하기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이라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가도 사실은 먼 우주에 못 가는 건데,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 이 안도감이 사실상

'우리'와 '현실'을 분리하고,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고 믿는, 

근대소설의 오래된 통념을 통해 완성되는 느낌.

그러니까 근대소설의 관습을 반복하는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소설의 관습이 현실로, 그러니까 소설의 현실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현실로 범람해들어오는 느낌. 되게 uncany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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