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도 '이어달리기 소설'인데, 계속 이어달리다보면 이 달리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잊어버리게 된다. 올림픽 400미터 계주랑은 다르니까. 바톤을 넘겨준 뒤 제자리에 서서 숨을 몰아쉬는 육상 선수들은 다음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달리기를 구경한다. '이어달리기 소설'의 선수들은 바톤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잠깐 손을 잡고 함께 뛴다. 잠깐, 함께 뒤는 거다. 다음 주자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지만, 그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윤성희는 오랫동안 이런 소설을 써왔고, 이 소설도 이런 소설이다. 이런 소설 쓰기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한때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런 소설을 오래 쓰는 것은 작가의 정신 건강과 건전한 정신문화 창달에 해롭다,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라고 손가락이 썼다. 손가락이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다음에 쓸 말을 결정하지 못한 것 같네. 해로운가? 아닌가? 이 소설은 해로운가? 아닌가? 한국소설은 해로운가? 아닌가? 한국소설 중에서도 윤성희의 소설은 특히 해로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손가락이.
윤성희도 손가락으로 소설을 썼겠지. 손가락으로 이어달리기 소설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레이스를 지켜보며, 손가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고와 죽음으로 연결된 이어달리기 소설을 쓰면서 손가락은 망설였을까? 손가락. 갑자기 왜 손가락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방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아니지. 직접적인 이유가 있고,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유가 있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도 바톤 터치 때문이었을 거다. 바톤은 손으로 주고 받는 거니까. 그리고 바톤에서 손을 잡고 뛴다는 생각을 연결시켰지. 그렇지만 더 직접적인 이유는 위에서 쓴 그대로,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손가락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구나. 이 소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구나, 이런 걸 손가락을 보며 깨달았던 거다.
그런데 <작가의 말>을 '다시' 읽어보니, 왜 판단을 망설이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왜 손가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알 것 같다. "작가는 어느 정도의 슬픔이 적절한지, 또 어느 정도의 희망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잇는 존재일까? 두 손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물었다.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나는 무서웠다."(310) 이게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유였다.
손가락에게 묻다보면 무서워지기 마련이다. 손가락은 너무나 솔직하고 영특해서, 내가 감추려했던 것도 기가 막힌 방식으로 표현해내고야 만다. 이렇게 손가락을 나로부터 분리해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윤성희도 알고, 나도 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나인데, 용기라는 건 언제나 무모하고 뒷감당을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뒷감당은 용기가 아니라 내 몫인데, 뒷감당을 하다보면 나는 어느 새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좋은 쪽으로도, 안 좋은 쪽으로도.
"아니에요. 어느날 프로야구 중계를 봤거든요. 유격수가 간단히 잡을 수 있는 공을 빠뜨리자 해설자가 그러더라고요. 저 선수는 어려운 걸 잘 잡고 쉬운 걸 못 잡아요." 양조장 주인에게 그 말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래서 내려왔어요. 쉬운 걸 잘 잡기 위해." 형민은 왠지 그 말이 슬펐다. 쉬운 걸 매번 놓치는 선수 때문에 슬펐다. 그래서 그날 밤 술을 꽤 마셨다. (279-280)
해설자들이 제일 나쁜 게, 쉬운 공을 못 잡는다고 자꾸 그러면 쉬운 공을 잡을 때 긴장을 하겠냐 안 하겠냐. 이 세상에 쉬운 공보다 어려운 공을 더 잘 잡는 유격수는 없다. 그런 건 이 세상에는 없다고. 물론 어려운 공만 잡으려는 사람들은 있는데, 나도 뭐 그런 부류라는 걸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저 공만 잡고 다음부터는 쉬운 공을 잘 잡겠어, 라고 다짐하지만 어려운 공이 왜 이리 많은지 쉬운 공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세월이다. 하지만 어려운 공을 잡는 것이 현실적이다, 라고 변명하지는 않겠다. 쉬운 공을 잡는 루틴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