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이 다른 곳에 속한 각각의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이해한다. 알바생을 쓰는 편의점 주인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독법이 어찌 같을 수 있겠나. 그래도 최선의 독법을 찾고자 텍스트 내부를 탈탈 털어서 뭔가 먼지나 머리카락 몇 올이라도 건지면 좋겠지. 그 먼지들과 머리카락들을 잘 분석하면 저자의 의도라는 것이 조금은 더 정확히 이해될 것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저자도 미처 마름질하지 못한 얼룩 같은 것도 발견될 거고, 그걸 대서특필해서 사회비판도 좀 하고, 사회적 수준의 무의식도 발견하고, 뭐 그렇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가다 밤길이 너무 어두워 전봇대에 부딪히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거다.
관조할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두지 못하면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힌다. 누구나 한 번은 그렇게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오고야 만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래서 상대의 발을 밟기도 하고, 머리를 박기도 하고, 혹은 너무 멀어져, 노안이 와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간다. 필연적인 거다. 머리를 박고 하나의 독법을 선택하는 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거다. 머리를 박는 순간 내가 속한 곳을 정확히 알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거리를 두는 것, 관조하는 건,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순간이다. 예외적인 것들은 예외적이므로 계산에 넣어서는 안 된다. 아니, 애초에 독서에는 계산이 개입하지 않는다. 계산은 작가가 하는 것. 나는 이미 결정된 내 위치를 책에 투사할 뿐이다. 머리를 박는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중간관리자의 언어로 잘 마름질되어 있지만 여전히 다성적이다. 마름질되었음에도 얼룩들은 얼룩인 채로 남는다. 얼룩을 피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된다. 그러니 얼룩을 볼 수 없는 노안도 이해해주어야겠지.
혹시 이제 텍스트의 다성성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 아닐까? 우리가 다성성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텍스트의 다성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더 많이, 더 다양한 목소리를 식별하고, 흉내낼 수 있게 되었고, 흉내가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다양한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그러한 위치를 갖게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이제는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 개개인의 독서 스크린에 각각 다양한 목소리가 투사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성적인가.
우리는 머리를 박는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되었고, 내 목소리도 여러 가지인데, 여전히 머리를 박고 소설을 읽는다. 볼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이 밑줄은 나의 것이다. 내가 밑줄을 긋는 순간 이 텍스트는 나의 것이다. 그러니까 머리를 박은 거다. 이건 도저히, 분리해낼 수가 없는 게 아닐까? 분리할 수 있다고 관조하는 그 시선은 정말 순간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 불리불가능한 위치에서 발화되는 단성적 목소리의 불협화음은 우리를 앓게 한다. 우리를 낡게 한다. 이 불협화음을 견디는 건 모진 일이고, 그걸 관조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모범적인 답은 구조적 원인을 찾는 것이지만, 구조적인 원인을 찾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거라 권장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국, 머리를 박고 얼룩에서 피를 보아야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현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소설이 현실과 관계맺는 것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는 걸 더 말해 무엇하랴. 소설을 읽고 머리를 박는 사람이 다수일 때 다음 스테이지가 현실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