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느린 소설과 빠른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당연히 빠른 소설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니까. 그런데 원래 앞선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지. 사건 중심이냐 심리 중심이냐 뭐 이런 걸로 나누는 질문인데. 이 소설을 앞에 두고 사건 중심이냐 심리 중심이냐 하는 교과서적인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소설은 분명 사건 중심이지만 낱낱의 사건이 최종적인 결과를 향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지 않기에 사건 중심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질문이 잘못된 거다. 질문을 바꿔보자.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쓰기 위한 소설과 읽기 위한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이 질문은 소설의 자기지시적 경향의 유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소설은 아무래도 쓰기 위한 소설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자기지시적 경향이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이 질문 역시 뭔가 잘못됐다.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윤리적인 소설과 비(그냥 윤리를 묻지 않는 소설)윤리적인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아무래도 윤리적인 소설인 것 같다. 이 질문이 결정적인 건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삶이 더 이상 나빠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한 소설. 이런 소설들이 지금 한국소설의 현주소다. 최악을 가정하고 있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니 최악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식 아닌가. 지금 내가 뭐라고 쓰고 있는 건가. 어디갔지? 선동렬의 슬라이더, 아니 최동원의 포크볼, 아니 오캄의 면도날. 이 악순환을 잘라낼 수 있는 것. 악순환이라니? 소설은 원래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든 건데. 복잡한 걸 간단하게 잘라낼 거면 왜 소설을 쓰겠니.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의 미학이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우리에겐(독자들)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이 일을 어렵게 만든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라고 외치다가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에 외치다가, 다음 생에는, 다음 생에는, 다음 생에는? 다음 생 같은 건 없으니 이제 퇴근이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