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코코팜과루디
오랑캐들
비락식혜  2019/01/09 21:42
  • 변경 1
  • 이문열
  • 6,300원 (10%350)
  • 1998-11-10
  • : 65

 

이문열 본명이 뭐였더라? 문열이 본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본명이라도 그렇고, 필명이라도 그렇고 이름 참 기가 막히게 지었네. 이문열의 옛날 소설들을 읽다보면 왜 이리 낯이 뜨거운지. 촌스러운 거야 시간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는 건데, 확실히 다른 40년대 생과는 달리 트랜드에 민감한 소설가임이 분명하고, 자의식 과잉 역시 뭐 이문열 소설의 본질 같은 거니까 얼굴 붉히지 않고 읽을 수 있는데, 자학과 오만이 짬뽕된 내포작가 역시 소설가라면 무릇 그래야하고, 뭐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읽는 내내 종종 낯이 뜨겁네.   

 

그래서 이게 뭔가 싶어 계속 생각해봤더니 이 '붉음'의 이유는 아무래도 '대화' 때문인 것 같다. '붉음'에 대해서도 더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아무튼 구어체로 된 대화들이 문제야. 지문은 작가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지. 작가의 자의식으로 얼마든지 덮어쓸 수 있지.근데 인물의 말은 그게 잘 안 된다.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소설가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날것 그대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열이 만든 인물들의 사투리는 바로 그 날것들을 현전시킨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가.

 

단순히 생각하면 언어의 운용은 지문이든 대화든 똑같은 거 같고, 작가가 마음 먹은대로 의미들을 실어나르기 마련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분신인 내포작가의 말을 받아쓰는 서술자의 지문에 비해 대화는 캐릭터로부터 상당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지. 특히 사투리는 단지 보편적인 의미와 평행하는 지방적인 기호로서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나름의 의미체계(어쩌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니까, 아님 말고. 아무튼 그럭저럭하여 소설가가 지방의 기호로 인물의 말을 받아적는 순간 그 대화 속에는 그 땅이 만들어내는 날것들이 틈입한다고 봐.  

 

이문열의 소설, 지금 읽고 있는 건 <변경>이니까, <변경>의 경우 한반도 동남쪽 사투리가 대화의 중심인데, 이 한반도 동남부 사투리를 읽을 때마다 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이 대화를 억양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데(물론 머릿속에서) 그 순간, 인물들의 마음과 그 마음의 바탕을 이루는 그 땅의 성장환경(뭐라고 해야 하나, 가정교육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어른들의 말을 통해 아래로아래로 전달되는 세상의 이치 같은 거?)이 동시에 내 머리통에 재생된다. 이건 좀 무서운 거다. 별 거 아닌 말들인데, 이 말들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이치를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역시 그렇겠지.

 

<변경>이라는 소설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오랑캐였던 한 시절, 서울에 모여들었던 사투리 유저들의  이야기다(3권까지만 읽어서 뒤에 어떻게 될진 모른다). 한국의 중심에서 '우리가 오랑캐야'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마음이란 뭐 대충 알만하다. 전혀 무섭지 않고 놀랍지 않고 아무렇지 않다. 무서운 건 그 오랑캐들의 사투리다. 그 사투리 속에 오랑캐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오랫동안 갈고 닦은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어서 무섭다. 그리고 내가 오랑캐들의 사투리 속에 새겨진 그 세상의 이치를 내면으로부터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얼굴을 붉게 만든다. 이 붉음은 부끄러움이거나 분노겠지.

 

근데 이 오랑캐들 본적이 어디야? 당연히 한반도 동남부라 생각하는데, 혹시 '문열'이나 '문약'은 아니겠지.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