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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소설집 | 래빗홀 펴냄
정식 출간 도서 사양 | 288쪽 | 350g | 134*200*2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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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우 작가의 2014년 작 장편소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읽었던 것이 거의 십 년 전이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펴낸 이후로도 송시우 작가는 미스터리 장르 소설가로서 꾸준한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어째 그간의 작품 중에선 챙겨 읽은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중학생 시절의 독서 경험이 유독 선연히 떠오른다. 도서관 신간 서가에서 라일락 흐드러진 보랏빛 표지의 소설책을 골라든 순간부터 완독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생각 않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눈에 그려질 정도다. 어릴 적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지고 뭉개진 채로 무의식 깊은 곳에 침잠하게 되고, 애써 떠올리려 하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편화된 채로 나타나거나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책을 경유한 경험은 언제나 좀 다르다. 넓디넓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골랐던 기억,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반쯤 파묻혀 몇 시간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독서 삼매경에 빠졌던 기억, 울적한 날이면 버스를 타고 시내의 교보문고에 가서 꼬박 하루를 책만 보며 보냈던 기억… 그 모든 기억의 장면들이 진득하니 마음에 남아 현재의 책 읽는 경험과 얽히고설키고 뒤엉킨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아릿하면서도 어둑하고 비극성이 짙은 작품이었지만, 작가의 신간 『선녀를 위한 변론』은 ‘범죄’를 모티프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이라면 툭 웃고 지나갈 수 있는 메타포들을 놓치지 않은 소설들을 모았다. 두 권의 책이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데 신기하게도 『선녀를 위한 변론』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읽었던 추억이 선명해졌다. 무의식이 송시우 작가의 글을 기억하는 것일까? 범죄 이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서사의 움직임을 따라 독자가 발맞춰 걸음을 옮기며 촘촘히 짜인 인물들의 내면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송시우 소설의 묘미인 것 같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읽었을 적에도 그랬다. 주인공 수빈이 죽음의 진상을 좇던 것을 열심히 따라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선녀를 위한 변론』의 경우 단편소설 모음집이기 때문에 가벼운 호흡과 정돈된 전개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다. 다만 단편이라 해서 치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범인을 추론하게끔 적당히 여지를 주면서도 사건을 질질 끌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소설집에 실린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각각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우리 설화 「선녀와 나무꾼」에 현대의 법정 체계를 도입하여 왕자/나무꾼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가는 작품들이다. 두 편의 단편은 설화와 동화의 기본 얼개를 잘 살리면서도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고, 동시에 이야기 속 인물들이 부여받았던 비극적 캐릭터성을 교묘하게 비틂으로써 다시 쓰기를 매개한 새로 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랑을 갈구하며 자신의 목소리와 목숨까지 바친 인어공주의 최후를, 선녀 옷을 잃고 졸지에 한 세간 남자가 강요하는 삶에 포획된 선녀의 운명에 그 누가 탄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가. 각각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던 비극성은 장르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유쾌하게 철퇴된다.(가제본 274쪽)’ 원형적 이야기는 장르 소설로 변주되며 전형성을 탈피하고 원형의 수용 과정에서 고착화되었던 서사적 문제점을 다중우주적으로 해소한다. 특히 「인어의 소송」이 나무꾼이 선녀에게 지은 죄(절도, 약취유인, 강간, 협박 등)를 나열함으로써 「선녀와 나무꾼」 설화가 가진 문제적 지점을 꼬집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은 국문학적으로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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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단 《100인의 변론단》 활동을 위해 래빗홀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