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곁을 떠난 애정과 잔존하는 안온
그 사이에서 변함없이 반짝이는 삶의 궤적
『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연작소설|안온북스 펴냄
여기에는 아는 사람의 이야기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있었다.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이들이 모두 방식과 지속시간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죽은 뒤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산 자의 세계를 떠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죽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인간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므로 이 소설은 어떤 식으로 설명한다 한들 경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당해도 빈들빈들 백수로 지냈어도, 퇴직금을 쪼개어 빌려 간 친구가 도망쳐 뭉칫돈을 날렸어도 내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버지였다. 항상 안방 침대를 차지하고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으므로 인간보다는 차라리 식물, 식물 중에서도 이끼나 뭐 그런 선태식물류에 가까운 정도로 무해하고 조용했다. (중략) 나는 나대로 바쁘게 자라느라 집구석에 물건처럼 놓인 아버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술에 취하거나 부지런히 살림을 들어먹는 또래 아버지들과 달리, 나의 아버지는 항상 젠틀했고 원하는 것이라고는 적은 양의 음식과 텔레비전뿐이었으니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16-17쪽)’
이처럼, 경계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은 비단 이 작품이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의미 분위에서 배타적이고 상보 반의어의 관계에 있으나, 인간이 그것을 말할 때는 결코 양극단의 어떤 중간 없는 상태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칼로 물 베기와도 같은 일이다. <오리배>에서 서술자의 아버지는 집안에서 거의 죽은 듯이, 무생물처럼 살아 있다. 한 문단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를 비유하는 대상은 식물에서 물건으로 이행한다. 그야말로 죽음에 가까운 삶이며, 그래서 결국 그는 죽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만 인간이 사는 방식은 그렇게 일률적이지도 않고 죽음이 찾아오는 방식은 때론 상당히 융통성이 없어서, 서술자의 경우 그의 아버지처럼 이미 죽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이다. 죽음 내지 죽음의 위기는 언제 어디서 부닥쳐올지 모르게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다 인간은 언제나 뛰어난 순발력과 기타 모면 능력으로 그런 위기를 극복해내고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초자연적인 생물이 아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모종의 이유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까지 생을 영위하던 터를 떠도는 것은 여타 판타지나 공포 장르 콘텐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인데, 그들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한의 정서나 복수 등의 다소 거창해 보이는 목적의식과 연결 짓지 않았다는 데서, 그리고 그들의 혼이 부유하며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주 특별하거나 큰일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무엇도 아닌 애정에 기반해 있다는 데서 나는 결국 이 소설에 이유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는 사람의 이야기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있다고 말한 것은, 이 연작소설집에 나오는 인물의 일부가 실제로 알고 지냈던 이들과 상당 부분 닮아 있는 순간들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흠칫하고 절망하기도 하였으나 이야기들은 항상 안도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말아서, 책 속의 인물들과 또 실존했던 인물들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저 안온하기를 바랐고 또 혹여나 그 일부가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더 편안히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날 수 있길 빌었다. ‘산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란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이지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므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언젠가는 그것을 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걸 나는 배워 알고 있기(48쪽)’ 때문에. 살아 있는 나는 지난 죽음을 영영 끌어안고 살지 않는다. 최소한, 살아 있는 상태를 택했고 그러한 선택을 일정 기간 지속하리라 믿는 현재는, 또 삶의 의지를 도무지 버리지 못할 지금은 발목을 붙들어 매는 어떤 것을 잠시 내려놓고 걸어가야만 할 때다.
‘그날 밤, 내 좁은 침대에 혜수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할 때에야 깨달았다. 왜 그 말이 불쾌하지 않았는지를. 비록 자기는 같은 것을 줄 수 없다고 못 박긴 했지만, 적어도 혜수는 내게 자기를 좋아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걸 이상하게도 나쁘게도 여기지 않고서. 그러자 갑자기, 아주 평화로운 무엇인가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149쪽)’ <세상의 끝>에서 혜수는 자주 죽고 싶어한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다만 곱씹다 보니, 혜수가 가졌던 삶에 대한 무심함 같은 것도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일종의 성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사랑하는 걸 허락받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대한 견제조차도 일순간에 전부 사라질 수 있기에, 그 유한함을 인지하고 존재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쪽이 자연스럽다는 걸 잊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정말로 중요하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인데도.
‘나도 엉겁결에 팔을 뻗어 혜수의 좁은 어깨를 안았다. 혜수의 어깻죽지에서 아주 옅은 해당화 향기가 났다. 나는 코를 깊게 박은 채 그 향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절벽, 이곳이 세상의 끝은 아닐까. 우리가 세상의 끝에 다다른 거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온 사위가 밝아지며 점점 빛 속으로 잠겨 들고 있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어딜까.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이. (157쪽)’ 그래서 비극으로 시작했는데도, 죽음 후의 이야기인데도 당신들은 아름답다. 과연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꼭 아홉 생을 살고 그 영이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아홉 번의 생>에서 아홉 생을 살아가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다뤄 주어 반가웠다. 죽은 뒤 일종의 혼백 형태로 이 땅에 머물다 제 이야기가 종결되면 사라지는 인간과는 달리, 고양이는 죽은 뒤 또다른 고양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식으로 존재했다. 즉, 인간은 이전 삶의 기억을 가진 채로 전생 또는 환생을 할 수 없는 생물임을 못 박아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여러 생을 기억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 말하기는 어려우며, 개체에 따라 이전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식물도, 기억하는 식물도 있었으므로 사실 모든 인간이 전생의 궤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다소 조급하다. 하지만 작품을 읽으며 아스라이 추측하길, 인간은 그러지 않게끔 살고 죽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을까.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움은 아니었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설령 내 사랑을 비웃고 무시하더라도 나는 그 애를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먼지투성이 소파 밑에 웅크려 끊임없이 자책했다. 내가 좀더 멋진 말을 할 줄 알았더라면. 좀더 부드러운 털결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더라면. 좋은 선물을 더 많이 가져다주었더라면. 그랬다면 그 애의 마음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내게 머물렀을 테고 결국에는 뭔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고양이가 아니라 선인장, 그 애와 같은 선인장이었다면. 우리는 뿌리를 얽고 물을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 (178~179쪽)’ 이렇게, <아홉 번의 생>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양이의 다정함을 닮았다. 고양이가 발자국으로 덧그리는 애정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고양이마저 사랑하고 또 그 고양이가 사랑하는 식물까지도 사랑하여 양쪽 모두 품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의탁하여 삶을 이어나가며, 그런 마음이 없어진다면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 결국 <오리배>의 아버지처럼 겉으로 보기엔 아주 무해해 보이지만 선태식물에서 무생물이 되어 덩그러니 남겨진, 영혼이 퇴색된 하나의 개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 아닌가.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로만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아무래도 태어나 삶을 살고 죽음을 경험하며 그럼으로써 존재를 종결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좋은 곳에서 만나요』의 서술자로서 등장하는 죽은 이들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며, 얄팍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애정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데다 그렇게 차츰 누군가에게 의도적 흔적 아닌 자연스러운 느낌을 남기고 또 궁극적으론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 기억된다. 곁을 떠난 애정과 잔존하는 안온 사이에서, 변함없이 반짝이는 삶의 궤적을 서서히 그려 나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영 기억되길 바라진 않지만, 바람 탓이라 돌릴 수 있을 만큼 잘고 엷게 물결을 일으키는 정도의 행위로써 나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누군가를 기억하려는 애정 어린 의지를 남긴다…. <이 세계의 개발자>에서 신이 말하듯, 인간이란 정말,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렇게들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289쪽)’한다.
✎°₊ 『좋은 곳에서 만나요』 서평단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인용 본문 쪽수를 기재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글과 카피는 직접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