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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알리바바님의 서재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P60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환자가 현실을 직시했으면 했다. 환자의 나이가 적든 많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때 남은 삶에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암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예정된 죽음은 어쩌면 삶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눈앞의 환자에게물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살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 없나요?"- P61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P63
문득 두려워졌다. 잘 버텨낼 거라고 믿고 지켜봐온 환자들도 순간순간 ‘차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실제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내는 환자들이 그런 순간에 죽지 않을 살고자할 용기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환자의 모든 순간을지켜볼 수 없는, 그 깊은 속까지 온전히 알 수 없는 의사로서 나는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S가 남기고 간 숙제가 어느 때보다 깊고 무거웠다.- P77
아무리 의학과 분자생물학을 배웠어도 이런 경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않는 일이기에 고작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저승 가는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같은 것이다. 그게 과학의 영역에있는 사람이 할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궁색해도 그렇다. 설명되지 않는 임종의 지연과 환자들의 버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모르겠다.
어차피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면 임종이 지연될 때 대답할 수 없는 환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때문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알아내서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평탄하지 않았을 삶과지난한 투병 끝에 떠나는 길만큼은 가능한 한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의사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바라게 되는 것이다.- P84
"음・・・ 선생님 제가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까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에서 묻는 질문에는 굳이 반대 의견을 낼이유가 없다. 마음먹은 대로 하라고 독려하고 나도 같은 생각이니잘해보라는 격려가 필요할 뿐이다. 
간혹 ‘마음을 정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과 ‘정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서로 괴로워진다. 상대방의 물음 속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J는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로 보였고 심지어 그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P110
아버지라는 보호막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남들은비 같은 것 맞지 않고 잘만 사는데 왜 나만 비를 맞아야 하느냐고불평을 늘어놓는 것조차 사치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그런 것은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비를 맞으면서도 비가 그치고 나면 해야 할일들을 눈앞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가,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어야 한다.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에 머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던 나이에 정신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으나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하는 내 몫이었다.
그 시절에 나를 놓아버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붙들어야 했던 것은 외롭고도 힘겨운 일이었다. 몰랐으니 지나왔지만 만일 그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작은 조언이라도 건네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나는 조금이나마 덜 힘들지 않았을까? 덜 외롭지 않았을까.- P117
그래서 그럴까? 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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