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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 님의 서재
  • 밤은 내가 가질게
  • 안보윤
  • 14,400원 (10%800)
  • 2023-11-09
  • : 982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거. 그래서 내가, 아직 상냥한 채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거. 그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_「밤은 내가 가질게」, 249쪽



『밤은 내가 가질게』에는 폭력을 겪은 사람들이 폭력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폭력에 침묵으로 대응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타인에게 가해를 저지른다. 혹은 폭력에서 벗어나 타인을 구하는 데 힘을 쏟거나, 가해와 피해의 갈림길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여기, 오빠의 범죄로 신상이 노출되어 직장을 그만둔 ‘나’가 있다. 돈가스집 아르바이트생으로, 동급생에게 괴롭힘당하는 초등학생 ‘동주’의 하교 도우미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남들처럼 오빠를 욕하지도 엄마처럼 오빠를 감싸지도 못한다. 오빠가 동생 “도윤의 갈비뼈를 부러뜨렸을 때 나는 화장실에 있었”으니까. 무서움에 압도되어 그저 “뻑뻑하고 차분한 굉음”(70쪽)이 지나가길 숨어서 기다렸으니까. 그래서일까 나의 바람은 “최선을 다해 생존하고 최선을 다해 쓸모없어지는 것”(41쪽)이 되었다. 자신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분노할 수 있는 입장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로 살아가는 삶. 죄책감과 분노가 범벅 된 복잡한 덩어리를 가슴에 지고 사는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흐를까.


탄원서 따윈 쓰고 싶지 않다. 쓸 수 없다. 사과하러 왔다고 말해도 비명만 질러대는 여자에게 돈을 건네러 가고 싶지도 않다. 치료비, 위로금, 합의금,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건 그냥 돈이다. 그땐 그걸 몰랐다. 내가 자꾸 벨을 누르자 여자는 베란다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여자는 십일층에 살았고 내 사과가 그녀를 또 한번 죽일 뻔했다. _「완전한 사과」, 44쪽


각각의 진심은 한계에 부닥쳐 만나지 못할 수 있고, 훼손된 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도’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아이, 반려견, 다리를 잃은 미도에게 나는 오빠를 대신해 사과할 수 없다. 진심이어서 미도에게 갈 수가 없다. 진심은 누군가를 해할 수 있고, 무섭고, 무겁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근데 이모.

 응?

 한 번은 왜 안 돼요?

 동주가 도토리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른다. 땀이 흘러 간지러운 모양이다. 얼마나 힘껏 문지르는지 손등 아래로 살갗이 밀려 눈썹이 웃기는 모양으로 일렁인다.

 승규 정강이 까는 거, 그거 딱 한 번이면 되는데. 그거면 나는 더 안 괴로울 자신 있는데. 그건 왜 안 돼요?

 동주 눈썹이 점점 더 거세게 일렁인다.

 그것도 안 되면, 그럼 난 뭘 해요? _「완전한 사과」, 65-66쪽


수선한 내 앞에 나타난 동주는 순수하고 순진해서 또 무력해서 나의 마음 한구석을 자꾸만 건드린다. 나는 동주의 등에 업힌 ‘승규’의 팔을 잡아떼거나, 게임에서 이기도록 욕설이 담긴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동주를 돕지만, 승규는 더 세게, 더 악랄하게 나온다. 승규의 지독함과 동주의 무구함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결국 무력으로 승규를 제압한다. “너무 작고 볼품없는”(71쪽) 어린애를 바닥으로 내던지고, 즉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게 나의 진심은 슬프게도 온전히 닿지 못한다. 나는 다시 번뇌한다.


이런 인간이었구나. 나는 망설임 없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구나. 이렇게 습하고 비열한 눈으로 사실은 아무 상관 없는 어린애를 바닥으로 내던지는, 이런 짓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그런데 그 두 가지뿐인가?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상대를 힘껏 내던지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나? _「완전한 사과」, 71쪽


「완전한 사과」는 폭력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의 난처함을 함께 보여 주면서 우리가 폭력에 대처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또한 완전한 사과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진심이 어긋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로 타인에게 접근해야 할까. 누군가를 돕는 것, 마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은 정녕 가능할까… 안보윤은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새로운 방향을, 더 나은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학과 조교에게 스토킹을 당한 ‘하진’. 엄마도, 아빠도, 경찰도 하진을 돕지 않는다. 이번이 “딱 한 번”이었다는 스토커는 하진이 아닌 경찰과 하진 부모에게 사과를 건네고, 하진의 엄마는 이번에도 “딱 한 번”뿐이었으니 용서해 주자고 말한다. “딱 한 번” 어린 하진의 목을 조른 뒤 사랑한다며 상황을 무마했던 엄마는 하진이 느꼈을 섬뜩함을, “딱 한 번”(106쪽)뿐이라는 핑계의 잔혹함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을까.


옆집 사람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다는 듯 하진과의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벌려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자기 집 현관문을 가리켰다.

 —우리집으로 올래요? _「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112쪽


기댈 곳 없는 하진에게 문을 열어 보이는 사람은 옆집 여자이자 잊고 지냈던 중학교 동창 ‘유영’이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답답하다 싶을 만큼 느리게 움직”(112쪽)이고, 따뜻한 맹물 한 잔과 구운 귤을 내어 주며 자신과 자신의 공간이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상대의 속도에 맞추어 빗장을 하나씩 풀 줄 아는 사람이다. 유영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쌓은 신뢰 속에서 하진은 차츰 마음을 열고, 회복의 단계를 밟는다.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고, 경계심을 거두어도 된다고,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당신 곁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몸소 내보이는 누군가의 세심함을 하진은 기다렸을 테다.


 —나는 그때, 매일매일 기다렸어. 

 —누가 나를 도와주기를, 누가 딱 반 뼘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봐주기를. 제발 누구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나를 숨겨달라고. _「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137-138쪽


하진에게 몸에 든 멍을 보여 주고, 폭력의 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오다기리 조의 엉덩이”(123쪽)를 떠올린다던 중학생 유영은 특유의 엉뚱함을 유지한 채로 성장해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헤쳐 나가는 중이다. 어두운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서 말이다. 문에 경보기를 설치하지 않으려는 하진에게 “왜 소용이 없어. 경보음이 울리면 내가 바로 뛰어갈 텐데”라고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곧바로 달려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곁에서 “가만히 그저 잡고만 있”(129쪽)는 행동이 어떻게 위로와 위안이 되고, 상대를 안심시키는지 아는 존재로 성장했다.


상처 파먹기를 거부하고, 피해자를 도우면서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는 모습. 그토록 자신에게 찾아오길 바랐던 어른이 되어 누군가를 돕는 삶. 작은 관심이 서로를, 우리를 구할 거라는 너무나 견고한 믿음. 비난하지도 불안을 조성하지도 않으며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또 다정하고 따스하게 다가가는 자세. 나는 이 이야기가 진부할 수 있을지언정 기실, 우리가 오랫동안 상상했고, 여전히 바랄 이야기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마음과 용기가 우리를 구할 거라는 믿음에 나의 믿음을 걸어 보기로 했다. 희망은 사랑을 할 것이고, 사랑은 용기를 줄 것이기에. 아직은, 희망을 상상하고, 돌보고 돌봄 받을 자리를 남겨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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