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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 임솔아
  • 15,120원 (10%840)
  • 2023-09-21
  • : 1,16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연재되었던 임솔아의 장편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의 정식 출간 전, 티저북 서평단으로서 2장 ‘관찰의 끝’을 읽어 보게 되었다.



선미는 옥상에서 불을 피우고 싶다고 했다. 화목난로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 우주는 화목난로를 만들지 않았다. 완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반대했다. 높은 건물에 있는 창문들이 옥상을 내려다볼 것만 같았다. 화목난로를 사용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원주택이 아닌 다세대주택 옥상에 화목난로가 있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 볼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상한 일이 해선 안 되는 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우주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것을 배워왔다. _80-81쪽(이하 티저북 기준)


‘우주’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원리를 탐구하는 일을 좋아했다. “궁리할 만한 요소를 일부러 제거해놓은” 듯한 인형 놀이를 주로 하는 여자아이들보다 탐구력을 요하는 팽이치기를 하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우주가 아홉 살이던 어느 날, 반 아이들은 “머리핀”으로 만든 탱크를 학교에 가져간 우주에게 “호모”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날 이후 우주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메모하며 여자다움을 학습한다. 사회의 렌즈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게 지쳐갈 즈음 우주는 ‘선미’와 가까워지며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그러나 이 감정에는 차츰 균열이 생긴다.



“내일이 전시 오픈이거든.” (...) “같이 전시하는 사람들한테 소개하고 싶어.” 우주가 말했다. 그동안 선미와 우주가 함께 만난 타인은 선미의 남자친구들뿐이었다. “애인이라고 말하고 싶어.” 선미는 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인?” 이상하다는 듯 선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네 애인이 아니잖아.” “아니라고?” “아니지.” 선미는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뭔데?” 선미가 손끝으로 미간을 긁적였다. “없어. 우리를 가리키는 단어는.” 선미는 웃었다. 이내 웃음을 거두고 리플릿을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이 된다면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_84-85쪽


우주는 선미를 좋아한다. 선미도 우주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주와 선미의 마음은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다르다. 선미는 “남성으로 태어난” 존재를 갈망한다. 선미가 원하는 사랑(의 대상)의 총합에는 생물학적 남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선미가 우주에게 “네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 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주와 “애인” 사이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우주와 한 침대를 쓰고, 스킨십도 마다치 않는 선미의 태도는 언뜻 모순적이고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선미가 고시원에서 지내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선미는 집밖에서도 스스럼없이 우주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우주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뭐 어떠냐며 선미는 웃었지만, 우주는 손사래를 쳤다. 한번은 인적이 없는 주택가 골목에서 선미와 키스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층 창문에서 한 여자가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선미와 우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주는 선미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아무도 안 쫓아와.” 선미가 말했다. 우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길가에 쪼그려 앉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서워?” 선미가 물었다. “무서워.” 우주가 답했다. 선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입꼬리가 휘어졌고, 눈빛이 무덤덤하게 바뀌었다. “무섭구나.” 선미가 중얼거렸다. _75-76쪽


아홉 살 때 들은 ‘호모’라는 단어는 낙인이 되어 우주의 가슴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우주는 낙인당한 자신의 본체를 공개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고,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한다. 반면 타인을 개의치 않는 선미의 태도는 우주와 전면적으로 대조를 띄는데, 선미는 참고 있는 듯하다. 우주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타인 앞에서 우주를 만지고 드러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꾹꾹 누른다.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우주와 함께 있기 위해, 우주를 지켜 주기 위해서.



우주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천천히 음미했다. 낯선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했다. 그 까닭을 생각하다가 우주는 이 자리의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 그 누구도 남이 먹는 방식을 주시하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으면서도 혼자 먹는 것처럼 그랬다. _62쪽


헤어질 때마다 우주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걷다보면 매번 누군가 무엇인가를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골목을 더 돌아보고 싶다거나, 멀리 삐죽이 솟아 있는 나무를 보러 가고 싶다거나, 나무를 보러 갔을 때에는 정말 나무만 봤다. 물을 보러 갔을 때에도 물만 봤다. 나무가 정말 크다거나, 강이 이제 녹을 것 같지 않냐거나 하는 대화를 했다.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혼잣말을 하듯 그들은 말을 이었다. (...) 미래에 대해서라면 이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주는 깨달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 우선 옆돌기부터 마스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 갈 것이다. 광장 한복판에서 옆돌기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놀라거나 박수를 치거나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것이다. 나무나 물을 볼 때처럼. 옆돌기를 옆돌기로 볼 것이다. _93-94쪽


시간을 견디며 지었던 집으로 미술 공모전에 당선된 우주는 그룹 전시 후에도 성현, 보라, 정수와 지속적으로 만난다. 우주는 먼 듯 가까운 듯 한 편안한 거리감이 주는 느슨한 관계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팬케이크 먹는 법,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에게 항의하고, 타인을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마음을 새로이 돌아본다. 남 얘기 하며 친목 쌓기 좋은 타이밍에 서로의 눈앞에 있는 것, 함께 공유하는 장소만으로도 이야기가 이어지고, 서로를 향한 안온하고 적당한 배려가 있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우주는 기뻤고, 자유로웠고, 자신이 되었다. 단지 함께 서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타인이 옆에 머물기만 해도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지지한다는 것. “곁에 서 있”겠다는 진실된 마음은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우주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평생을 고시원에서 살아가게 될까봐 선미가 두려워했듯, 우주도 이대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까봐 두려웠다. 남자를 좇는 선미의 뒤에 평생 서 있을 우주. 내 마음 같지 않은 애인이나 꿈과 상관없는 직업을 택한 나. 이보다 보통의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을까. 보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우주는 이제 잘 알았다. _82쪽


우주는 선미를 축으로써 움직인다. 그는 선미의 요구에 맞춰 재수를 했고, 선미가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다. 공간에 욕구가 있는 “우주의 꿈”은 “선미를 위한 집을 만드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주는 “우주가 없어”야 “선미를 위한 집”이 완성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모른 체”한다. 우주의 집은 회사 생활, 선미를 기다리는 시간을 견딜 때마다 만든 미니어처 집뿐이다. 마침내 우주는 본인의 시선이 투영된, 선미 없는 ‘선미의 집’을 만듦으로써 별렸던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선미는 그에 담담히 응한다. 기실 알고 보면, 선미와 우주는 서로를 기다려 준 듯싶다. 상대가 결정의 준비를 마쳤을 때 이별이라는 “결실”을 함께 맺기 위해. 둘은 끝내, 무사히, “기어이 같이,” 평온한 “축복”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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