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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오늘을 읽고, 내일을 준비한다
  • 개화기의 선각자 서재필
  • 김삼웅
  • 17,100원 (10%950)
  • 2023-12-20
  • : 110

1884년,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이다. 사실 나는 이미 40대를 넘겨서 처음 책에서 100여 년 전이라고 했었는데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좀 더 옛날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어찌 됐든 그는 불과 21세 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 인사들과(이들 모두 30대 미만의 젊은 양반으로 흔히 말하는 세도,문벌가의 자제였다, 김옥균은 구한말 최고 세도가문으로 왕비를 3대에 걸쳐서 배출한 신안동김씨의 자제, 박영효는 노론의 명문가인 반남박씨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였다. 홍영식은 아버지가 대원군 집권기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아들이었다)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독립과 개혁정치를 이룩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재필 역시 지방 유생 서광언의 아들에서 5촌 당숙(다른 자료에 의하면 7촌이라고도 한다. 김삼웅 선생님은 5촌 당숙으로 표현)이면서 한양의 세도가인 양모쪽 외숙이었던 판서 김성근이 집에 살면서 많은 문벌자제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의 출생연도에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김삼웅 선생님은 여러 기록에 의거 1864년생으로 정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가 태어난 시기 과거에 급제해 아명이 쌍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훗날 그의 정변때문에 이들 모두 고초를 당하고 서재필과 사이가 안 좋게 된다.

특히 이 시기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한성으로 올라와서 이후 정변의 주역들과 함께 개화기의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중인 이동인 등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과거 급제는 그가 해방 후 한국에 와서 13세때 급제했으며, 장원이라고 했으나 그렇지는 않았고 19세 최연서 합격이었다. 

후자라도 대단히 뛰어난 인재임에 틀림없다. 

 

갑신정변 직전 승지로 특진한다. 불과 21세의 나이로 지금의 비서실장이 되는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 내걸었던 문벌 폐지와(아이러니하게도 주동세력 모두가 문벌이었다. 물론 그들이 문벌이기에 더욱 명분이 섰을 수도 있다) 인민평등권 확립 등 이른바 '14조 개혁요강'은 봉건주의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수구세력이 끌어들인 청나라 위안스카이의 군대에 진압되어 이른바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서재필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여기서 끝이 났다면 서재필이 오늘날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혈기만 믿고 무모하게 작당하여 그저 실패한 개혁가 정도로만 남았을 것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와 아내는 모두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그의 두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죽었다. 

특히,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승지를 역임한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독약까지 보내며 시집으로로 쫓아보냈다 한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그의 생부, 형제들 모두 집안이 풍비박산하게 된다.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비통함에 가슴을 쳤다.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도 마찬가지로 음독자살한다. 영의정을 지낸 명망가였음에도 말이다. 

다만, 박영효 가문은 고종 입장에서 철종의 사위였던지라 덜 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귀화하고, 미국 시민권도 받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안 의과대학(오늘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한 뒤 의사면허증도 땄다. 다만, 각종 기록에서 서재필 박사라고 하는데 이는 의사인 Doctor를 박사로 착각한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갑오개혁이 일어난 후 국내정세는 바뀌었다. 서재필 등에게 내려졌던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김옥균은 후에 순종대 규장각 대제학으로 임명되고 충달이라는 시호도 받는다. 

갑오개혁의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명했다. 이에 서재필은 1895년 귀국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정변에 실패해 쫓기듯 떠난 고국에 미국 시민권자로 귀국해 백성을 계몽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창간일인 4울 8일은 오늘날 '신문의 날'이 될 만큼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우리나라 한글이 보급되고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 창간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해서 개화사상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 역할을 하면서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고, 정부 대신들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열갈등릐 이권 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수구파 정부와 국제열강들에 의해 서재필의 역할에 반대해 그를 미국으로 추방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한국회의'를 개최하고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이승만도 당시 조선인치고 작은 사람은 아닌데 서재필은 그보다 더 기골이 컸다고 한다. 

특히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도 봉사하였다.

서재필은 특히 미국 정부의 한국 문제 수석고문에 위촉되어 1945년 해방 후 환국한다. 미국 측은 한때 고집이 센 이승만보다 서재필을 남한의 집권자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이승만의 견제를 받다가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 미국으로 쫓겨가고 3년 뒤 서거한다.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한국말이 서툴기도 했고 외국인 행세를 하며 한국을 귀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으로 귀화한 1호 한국인이기도 하다. 미국 여성과 재혼해서 살고 시민권을 받았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금 아쉬운 행보이긴 하다. 

 

지은이 김삼웅님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독립기념관장을 지내고 국내 근현대 인물 평전을 다수 집필했다. 

서재필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서재필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는 미국 주류 사회에 최초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룩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 그로 인해 한인들은 많은 힘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미주지역에서 한국의 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서재필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그들은 서재필을 이승만과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기렸다.

유석 조병옥 박사는 서재필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아가 냉혹한 미국의 현실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

서재필은 개화사상가이자 혁명가로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정적 평가는 자신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자의식과 강렬한 양반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낄수 있었다고 주변인들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고 이해타산에 능한 처사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핍박을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보상심리 정도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어찌됐든 그는 대한민국의 개화사상가이자 미국식 의식의 추가로 인해 합리주의적 민중 계몽운동 및 조국의 발전을 위해 많은 조언을 한 것이 사실이고, 기술, 노동을 장려하고 지방자치나 노비해방 둥 계몽 선구자적인 행보도 보여준다.

다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과해(?) 한국민에 대한 경멸 등이 있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서재필은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하면서 동포들의 성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애국심을 가장한 민폐라고 규탄했다. 애국과 민족 운동은 순수한 봉사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직접 일하여 생활비와 활동비를 조달했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도독립 운동 자금으로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

안창호가 서재필을 남달리 존경하게 된 것은 3.1 운동 당시 망한 조국을 위한 봉사자로서 그의 재산과 몸을 다 바쳐 한 헌신자였기 때문이다. 

일부 비판받아야 할 점도 있지만 그는 김삼웅 저자님의 말처럼 개화기의 선각자였다. 

 

* 두레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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