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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님의 서재
  • 자정 너머 한 시간
  • 헤르만 헤세
  • 15,300원 (10%850)
  • 2025-12-01
  • : 1,540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헤세의 소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얇은 책이라 금방 읽었지만, 도대체 뭘 읽었는지 정리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수필 스타일에 고민하다, 다른 분들이 쓴 서평을 모두 읽어봤다. 결론은 스토리나 감동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림을 감상할 때, 나 자신의 느낌을 쫓아가듯 이 책 역시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으로 읽었다. 쇼팽의 야상곡(Nocturnes) 전곡 듣기를 틀어 놓고, 헤세가 안내하는 꿈의 풍경 속으로 나만의 느낌을 따라갔다. 쇼팽의 야상곡은 #자정너머한시간 이라는 이 책 제목과도 잘 어울린다.


레고 블록들이 바닥에 쫘악 펼쳐져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래서 이게 무슨 이야기지?' 하며 당황했던 것이, 레고 블록처럼 문장을 이리저리 펼쳐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안 돼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야상곡(Nachtstück)>

쇼팽의 야상곡을 들으며, 이 단편을 조금만 읽어보자. 근처의 물 위에서, 마치 빛나는 띠처럼, 하얀 밝음이 나타난다. 멈춰서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큰 백조다. 백조가 천천히 헤엄쳐 나간다. 멀리 저 멀리 호수 안으로. 여기까지는 상상이 잘 된다. 


갑자기 백조가 상처 입은 채 당당히 몸을 들더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돌에 부딪혔나? 백조가 가라앉는데 달콤한, 상처 입은 음이 성과 호수 위를 맴돌고, 나는 그것이 백조의 노래인지 혹은 검은 사랑의 하프에서 깨어난 음인지 알지 못한다. 


백조가 가라앉으며 노래를 한다고? 검은 하프는 앞에서 등장했다. 이 흑단 하프는 고요한 신의 팔에 걸려 있다. 하프의 날씬한 낯선 형태와 가는 현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불후(不朽, 썩지 않음) 하는 강렬한 과거의 헤아릴 수 없는 숙명과 열정을 들이마신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내가 막막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과거를 상상하나 보다 하며 내 느낌만 잡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편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파수꾼이 일어서서 고개를 들고 무아경에 빠져 황홀하게 그 하얀 기적을 눈으로 좇고, 귓속에 달콤한 음을 들으며 한참을 더 서 있다. 황홀하리만큼 듣기 좋은 고요가 나를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p.122)


황홀하게, 하얀 기적, 달콤한 음, 듣기 좋은 고요... 이렇게 느낌만 쫓았다. 어쩐지 나까지 후련해진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9개의 산문 모음집이다. 자정은 하루의 끝이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고요한 시간, 스무 살 무렵의 헤세는 내면으로 깊이 고민하며 이 글들을 썼을 것이다. 


<섬 꿈(Der Inseltraum)>

게르트루트 부인이 등장하는데, 어릴 적 소꿉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둥근 뱃머리를 들어 바위에 올려놓았다. 초록이 무수한 농담으로 녹아들어 있었다. 참기 힘든 고독이 하늘보다 강력하게 나를 덮고 있었다. 이렇게 용기 없는 사람이 우리 섬으로 오는 고생스러운 길을 찾아냈다니" 헤세에게 게르트루트 부인이 네 작품은 성장할 거라고 격려해 주는 느낌이었다. 


<엘리제를 위한 알붐 블라트

(Albumblatt für Elise)>

알붐블라트란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짧은 기악곡이다. 젊은 날의 헤세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를 들으면서 썼나 보다. "모든 여인 중 가장 아름다운 그대여. 그때 그대가 내게로 다가오네..." 나는 왜 브라운 아이즈의 '그녀가 나를 보네'가 생각날까?


<열병의 뮤즈(Die Muse im Fieber)>

뮤즈는 영감을 주는 신이다. "그녀는 지금도 내가 쓴 글을 보며 한숨을 짓고 눈빛 속에 창백한 죽음을 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이 생각났다. 풍부한 감성을 가졌던 사춘기 시절의 헤세가 느껴졌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Incipit Vita Nova)>

단테의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고 한다. 이 구절은 단테가 그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9살 때 처음 만나면서 사랑과 영적 성장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의미했다.


헤세는 "나의 삶에도 평범함에서 특별함으로 변화가 일어난 지점이 있다."라고 한다. 추락, 체념, 슬픈 밤에 머물던 사람에서, 회복하는 사람, 감사와 평온과 행복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사람으로.


<왕의 축제(Königsfest)>

왕비가 가인에게 바이올린을 가져오라는 부분을 읽으니 존 바에즈(Joan Baez)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The River In The Pines)'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가인은 노래하는 사람(歌人)인지, 아름다운 사람(佳人)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이올린으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글을 읽으며 추억의 노래가 생각나기는 처음이다. 


p.85  왕비는 가인에게 말했다. "이토록 달콤한 선율을 들은 건 오랜만이네요. 고마워요!"


<말 없는 이와의 대화

(Gespräch mit dem Stummen)>

말 없는 이란 귀신? 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었다. 친구가 연주를 너무 잘해서 시기심에 사로잡힌 연주자가, 친구를 살해한다. 그 친구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그의 앞에 나타나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살인은 안 된다. 살인을 하면 그 사람이 이렇게 귀신으로 나타나 내 피를 말려 죽일 거니까. 넷플 드라마인 <자백의 대가>가 생각났다. 

p.103  나의 악마와 나의 섭리처럼 널 사랑해. 그런데 너는 날 어떻게 사랑하지?


<게르트루트 부인에게(An Frau Gertrud)> 

이 부인은 헤세에게 영감을 준 부인일까? 단테의 베아트리체같이?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는 주인공 쿤과 무오트 두 남자가 이 게르트루트라는 여인을 둘러싸고 갈등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헤세가 만들어 낸 뮤즈일까?


p.112  당신은 내 꿈의 하늘에 가장 자주 나타났어요. 당시 나의 가장 암울한 날에 그랬던 것처럼 온화한 은총의 별로서, 복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서. 


나는 이 <게르트루트 부인에게>의 내용이 이 책의 표지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어둑해지는 저녁은 귀향, 별은 영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밤, 광채 없는 한 점 별, 당신은 한밤중에 어딘가 당신의 방에서..."


<이삭 여문 들판 꿈(Traum von der reifen Ähre)>

찬란한 햇빛을 받아 빛나는 들판이 그려진다. 환희로 가득한 느낌이다. 이삭 여문 빛나는 들판이여, 너는 해방된 내 영혼의 모습이 아닐까? 글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상상해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빨간 머리 앤이 왜 그렇게 공상을 좋아했는지 이해가 됐다. 


숲을 산책하는 상상을 해 보자. 맑은 공기, 진한 녹음,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내리는 눈부신 햇살.. 그저 느끼는 것. 그게 힐링이다. 상상하면 금방 행복에 빠진다. 


p.126  고요한 들판의 빛과 하나가 되어 나의 눈과 가슴이 내 어린 시절의 형제들 가운데로 돌아온다. 넘실대는 들판으로, 순수한 하늘로, 형제자매 같은 나무들과 개울들과 바람들로. 


글을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서문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스케치"이고, 내가 내린 결론은 "글로 그린 스케치 북"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이 책으로 상상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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