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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님의 서재
  • 고독의 이야기들
  • 발터 벤야민
  • 19,800원 (10%1,100)
  • 2025-04-02
  • : 17,745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독의 이야기들>의 독일어 제목은 Geschichten aus der Einsamkeit다. Geschichten은 이야기들이라는 뜻이고, aus는 ~로부터, der Einsamkeit는 고독이라는 말이다. 고독으로부터의 이야기들 또는 외로움에서 비롯된 이야기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책은 영문 편역본 The Storyteller : Tales out of Loneliness를 완역한 것으로 총 42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고독의 이야기들>은 28번째 이야기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을 보면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라고 표현했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독이라고 하면 좀 철학자 같고, 외로움이라고 하면 일상 용어인 것 같다. 그래서 검색해 봤다. 고독(Solitude)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홀로 있는 상태로 명상이나 독서 또는 음악 감상을 하는 등 평안하고 긍정적인 느낌이고, 외로움(Loneliness)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거나, 친구들은 많은데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상태, 낯선 환경에 혼자 남겨졌을 때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 책은 <고독의 이야기들>이라고 하지만 외로움도 느껴진다. 초월감과 자유로움도 있지만 괴로움과 고통스러움도 있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외로움을 품은 고독으로 생각하고 읽었다. 그렇다면 뒷부분에 있는 재밌는 이야기들은 왜 이 책에 포함시켰을까. 나는 웃음은 또 다른 고독의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외로움을 웃음으로 포장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옛날에 엄마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너무 외롭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산후 우울증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그 외로움은 그저 외롭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런 외로움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죽을 만큼 외롭다?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은 이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마치 글로 그림을 그리듯 고독을 표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독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건강한 사람들도 가끔 문필가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을 살면서 삶이 주권자임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주권자임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림을 보듯 글의 이미지를 따라갔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삶이 주권자임을 제대로 느껴 본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꿈과 몽상과 이미지의 점철을 통해 삶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저히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고독에 관하여, 어떤 왕비의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고독한 삶을 통해, 유명한 거장들의 꿈을 통해, 이해가 아닌 그냥 이미지로 느껴지는 고독을 말하고 있었다. 삶은 주권자이기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보다. 이 책 역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따라가며 느껴보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반전은 뒷부분에 있다. 삶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구나를 만끽하다 보니 나의 마음의 휴식을 주는 쉬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어렵게도 이렇게 쉽게도 쓸 수 있는 작가는 정말 천재가 맞다. 11살짜리 소녀가 주어진 제시어로 작문한 것도, 수수께끼도, 고압 전류 아이디어로 사업을 다시 일으킨 중국 명선생 이야기도 재밌다. 나는 포템킨 총리의 서명에 빵 터졌다.

모든 것이 색채들의 습윤함에 잠겨 유영하는 듯 보였는데, 특히 우세한 색은 무겁고 축축한 검은색이어서 그 꿈속 풍경은 이제 막 또 한 번 고생스럽게 경작된 농지의 풍경 같았다. 내 노년이 씨앗들이 이미 그때 거기에 파종돼 있었다. (p.73)

나는 이 부분에서 고독을 느꼈다. 노년의 씨앗은 또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 이 책의 표지가 축축한 검은색을 띠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제목과 잘 어울린다. 표지에 있는 파울 클레의 '여자와 짐승'이라는 작품 역시 고독과 잘 어울린다. 대지에서 여자와 짐승이 나와서 애써 살다가 결국은 대지로 간다. 여자의 치마처럼 보이는 것은 다시 흙이 되어야 한다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바위 같은 운명처럼 보인다. 여자와 짐승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렀던 꿈일까.

이 책에는 스위스 출신의 독일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도 50점 수록되어 있다. 이 분의 그림도 꿈같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도 파울 클레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우연인지 사망한 해가 같다. 발터 벤야민은 자살을 했다. '일기' 라는 작품에 보면 꿈속에서 "이제 저는 더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고 한다. 이 말이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마지막 우정 표현 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왜 발터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작품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꿈처럼 모호하기 때문이다. 술에 만취한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현실에서 걷고 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면 꿈속을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면 꿈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말한다. 대체 왜 세상에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세상을 생각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세상은 없어도 상관없다. 그 있는 것들 중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부분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데는 달빛 한 줄기면 충분했다. 내가 그의 말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애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치 비가 오면 그저 비를 바라보는 것처럼.

밤중에 어둠 속에서 깼을 때, 세상은 말없이 던져진 단 하나의 질문일 뿐이었다. 세상은 왜 있는 것일까?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니, 나는 그것이 늘 놀라웠다. 세상이 없다니 정말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고 해도 세상이 있다니 정말일까? 하는 의심보다 정도가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삶은 질문하는 게 아닌 것이다. 받아들이고 즐기자. 즐거운 꿈을 꾸자. 고독 속에서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평화로움을 느껴보자.

책 속의 표현 중에 지나온 내 발자국을 누가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는 말이 있다.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을 뿐이다. 이 세상은 한바탕 꿈이라더니, 고독도 즐거움도 꿈이라면 이왕이면 행복한 꿈을 꾸자. 처음에는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뇌를 혹사시키다가 뒷부분에서 웃음으로 치료한 난해하면서도 독특하고 한마디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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