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계에서 한국의 근대를 어디로 잡을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론은 언제나 뜨거운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근대’라는 개념을 ‘중앙집권화’로 보느냐 ‘화폐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점으로 다투고 있다.
현대는 또 언제부터일까? 현대의 출발은 ‘헌법’이라는 체계 도입에 있다. 헌법은 시민민주주의라는 절대 명제를 이루는 기본 토대다.
완전한 선거를 통한 시민민주주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출범부터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어디까지나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출범부터다.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쳤으니, 이에 합당ㅎㅎ한 독립된 정부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은 논리상 당연하다. 단, 직선제 혹은 간선제 선거를 거치지 않고 정부가 만들어져, 임시정부는 미완의 정부다.- P9
너무 많은 돈을 빌린 고종과 민비에게는 위민(爲民: 백성을 위함),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정신 따위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자와 원금을 일본에 갚아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백성들에게 가한 왕실 지배층의 폭력은 백성들 생존권을 위협했고, 마침내 그 불만이 폭발한다. 임오군란의 발생 원인은 이렇게 봐야 옳다.
임오군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수도 한양에서 일어난 중앙군대의 반란이기 때문이다.- P23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의 1차 목적은 성공한 셈이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해 직접 대군을 파견해 나서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이때까지 그들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조금은 두려워했다고 봐야 한다. 리홍장이 직접 건조했던 청날라 ‘북양함대’의 존재 때문이다.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조선에 출병할 일이 있으면 한쪽이 나오면 나머지 한쪽에 통보하고 간다"라는 내용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역사는 그 후 이렇게 진행된다.
조선국에 변란과 중대한 사건이 생기니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동학농민은 한양진격을 포기한다. 외세가 들어온 것에 너무 놀라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두 외세를 물러가게 할 방법은, 저 톈진조약 마지막 부분,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두 세력은 자진해서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럴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청나라 세력은 "뭐 여기가 원래 우리 청나라 속국이야"라는 태도로 느긋했다. 동학농민군은 척양(斥洋: 서양을 배척함) 척왜(斥倭)를 외치며 이를 갈면서도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선택한 상황이었다.- P41
‘정한론征韓論’이다.
즉 우리가 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이룬 후, 한반도 다시 말해 조선을 치자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고생 또 고생 영국, 러시아, 포르투칼, 네덜란드 등과 어떡하면 사탕수수 및 어패류를 평등하게 교역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왔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린 바쿠후에 계속 복종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 도쿠가와 바쿠후를 군사로 엎어버려야겠다. 그런 불평등조약에 절대로 따를 수 없다’같은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를 몰아내자는 도막倒幕 세력,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외세를 쫓아내자는 존황양이-일본어 손노조이-파들이 일본에 속속들이 등장했다.
권력의 정점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계속 싸웠지만,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인 한바쯔(사쯔마, 조슈, 히젠, 도사만의 권력 독점-자민당 160년 독재-)는 위세를 떨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P43
조선 침략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처음이자 본래 목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P57
태후 정권의 부정부패로 포탄은 탄약이 아닌 나무 덩어리, 혹은 진흙 덩어리였다.- P63
그레이트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대륙에서 바다로 나오려고 애쓰는 러시아를 상상하면 된다. 부동항을 얻고자 사활을 거는 한쪽과 이를 저지하고 전 세계 제해권을 독점하려는 다른 한쪽, 영국 해양 세력 대 러시아 대륙 세력 간 힘 싸움이다.- P73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 미국의 반체제 인사 호머 헐버트의 공로를 내세운다. 호머 헐버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사실상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어기고 조선에 대한 의리를 져버리며 실리만 챙겼다고 봤기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서도, 사실상 일본이나 미국보다는 조선을 위해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필자는 위 주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어떤 정책을 펼 때 실무자 혹은 후원자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체를 주괂하며, 그 사람 없이는 아무 일도 되지 않았으리라고 판단하는 오류와 같기 때문이다.- P111
일본군을 조선에 소규모 군대만 남겨둔 채 거의 모두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로 집결했다. 조선에 남겨진 소규모 부대는 그대로 조선의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에게 개틀링 기관총의 조작법과 크루제 야포의 조작법을 가르쳐줘 뤼순과 비슷한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학살한다.- P154
대영제국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를 확보해 극동에서는 직접 활약한다기보다 대리인을 찾아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을 막는 데 주력했다. 일본이 선택된 이유다.
증오의 목표는 독일보다는 러시아였다. 랴오둥반도를 두고 일번을 벌일 태세였다.
일본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미국에 보내, 일본 채권을 팔아 전쟁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도 일본 채권을 사려 하지 않았다. 다카하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유대인 포그롬’, 즉 대박해 사전이 벌어지며 국면이 완전히 뒤집힌다. 세계 제일의 유대 자본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본을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몰도바의 유대인 학살은 재정러시아가 주도한 것이었다. 재정러시아에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된 로스차일드 패밀리는 일본 채권을 사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해서, 동유럽에서 러시아 군대를 극동의 일본쪽으로 움직이게 한다. 러시아에는 차관을 끊고 투자마저 중단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막대한 피해를 보며 상처뿐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P156
조선은 그대로의 독립을 원치 않았다. 되찾을 것은 왕정조선보다 더 발전된 정치체인 민주공화제 조선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되찾아올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조선 4색 당쟁 중 노론을 제외한 소론, 남인, 북인은 궤멸하다시피 됐다. 영남 남인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해 만 명이 상소를 올린다는 ‘만인소’ 등의 이벤트성 정치 행각을 계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19세기를 보낸 조선의 벼슬아치라면, 나라를 팔아먹는 행각에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왕정 조선을 해체하고,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을 창조하는 데로 생각이 미치게 된다.
노론이 망치고 팔아먹은 국가에서 소론이 독립운동을 했으면, 대통령이 소론에서 나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