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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블리님의 서재
  • 호구
  • 김민서
  • 13,500원 (10%750)
  • 2026-03-06
  • : 5,430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금발 사춘기 소년의 그늘진 얼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표지 그림이 내게 준 인상이다. 차례의 호구, 축 등 바둑 용어를 보며 바둑이 주요한 소재인가? 하는 예측을 해보았다. 순하고 깨끗하게 사는 좋은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개자식’이 되기로 한 ‘김윤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부의 가정폭력과 외도 끝에 이혼하고, 전기기술자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어머니 대신 왜소증 장애가 있는 외할아버지가 주양육자인 윤수는 심성이 곱고 행동거지가 바른 고등학생이다. 자동차 압류고지서가 날아오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어머니의 직장 문제로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닌 탓에 원래 활달하던 성격은 온데간데 없고 위축된 채로 학교생활하는 윤수는 무리짓기를 좋아하고 서열에 민감한 남학생의 세계에서 좋은 먹잇감이 된다. 소심하고 남에게 좀처럼 싫은 소리를 못하는 윤수를 같은 학교 학생들은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 체육복을 멋대로 가져가 더럽힌 채 돌려주는 등 호구 취급한다. 지역구 재선 국회의원과 번화가에 자리잡은 피부과 원장의 아들 권이철은 권력과 돈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으스대며 같은 반의 윤수, 그리고 ‘쫄’이라는 별명의 주온을 괴롭힌다.
윤수 할아버지의 장애는 우리 시대의 고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왜소한 체구는 신체적 장애에 그치지 않고 지배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하층 계급으로서의 메타포다. 마찬가지로 윤수는 할아버지의 장애, 아버지의 부재 등 사회적 정상성으로부터 이탈된 상태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애써 참아 넘기는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한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이렇다.
<아이들은 권이철이 뻔뻔하다며 실컷 욕을 해댔다. 불쌍한 쫄의 인생을 망쳤다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쫄의 인생을 망치지 않은 척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한 아이가 아침부터 반에 뛰어 들어오더니 자기가 아주 재미난 걸 봤댄다. 무얼 봤냐고 물었더니 놀라지 말라고 하며 말을 이었다.
무려 권이철이 골목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처맞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권이수가 지 형한테 처맞던 거 모르는 사람 여기 있냐고, 자기가 보니까 권이철은 아버지한테 맞고 분풀이로 지 동생 권이수를 패는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론이 뒤바뀌었다.
“권이철 이거 불쌍한 새끼였네.”
애들이 속닥거렸다. 나는 유독 신경 쓰이는 말 한마디를 되짚었다.
불쌍해.
걔가?> (160~161p)
학교폭력에 관해 설명할 때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를 이야기한다. 사실 방관자는 가해자가 저지르는 학교폭력을 못 본 체 함으로써 가해자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피해자의 고통이 지속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소극적 가해자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김윤수와 권이철, 주온의 동급생들은 권이철이 주온과 김윤수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을 묵인하고, 떄로는 동조하며 권이철의 타깃이 자신은 아님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렇게 권이철의 악행에 일조했으면서 상황이 바뀌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고, 권이철이 그의 아버지에게 맞는 걸 봤다는 얘기에 권이철을 동정한다. 참 값싼 동정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책임을 손쉽게 망각해버리고 공동체를 좀먹는 폭력을 외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씁쓸했다.
또한 동생 권이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에게 위압적으로 굴고 행패를 부리던 권이철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권이철의 괴롭힘 기저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반듯하게 생활하는 윤수의 모습에 대한 시기와 증오, 동경이 자리했음을 제시하는 점이 복합적으로 생각할 계기를 주어서 좋았다.
이 대목에서 폭력적인 성향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퇴학당한 옛 제자가 떠올랐다. 중 2 때 “쌤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데 요새는 학교에서 안 때려서 애들이 이 모양이라던데요.”라고 히죽대던 그 아이는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실수로 어깨를 부딪힌,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학생을 바로 목졸라 기절시키는 등 숱한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살았다. 전직 조직폭력배, 현직 건설 인부로 일한다는 아버지는 체벌로 아이를 키웠고 2차 성징이 찾아와 더 이상 고분고분히 맞지 않고 몸으로 대들게 되자 그제서야 학교에 찾아와 부모 상담을 받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퇴학당한 후 동네 편의점 등 되는 대로 알바를 하며 그 와중에 또 중학교 후배들에게서 돈을 뺏다가 파출소에 들락거리기를 수 차례,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호구 성향으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동시에 호구가 가져야 하는 목표, 인생을 감당하고 세상과 맞서는 방법에 관한 질문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지만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윤수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가 통과해온 시간들에 함께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그를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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