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며칠 전에 친구의 책장에서 보고, 빌려서 읽어 보았다. 책의 분량은 몇 시간 동안 생각하면서 읽어볼만한 짧은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실로 모든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안 읽어서는 안될, 그리고 처음 개혁신학을 접한 사람은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도 처음에 개혁신학을 접하고 난 후 이 보물 같은 진리를 가지고 아무 사랑도 없이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드렸다. 어머니와는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는데 개혁신학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와 말로 다투게 되고, 결국 서로 아무런 유익도 없이 상처만 남고 끝이 났었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중요하지 않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겸손한 정통신앙이다. 줄거리를 써보면서 겸손한 정통신앙이 무엇인지 마음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1. 태도가 중요하다.
정통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을 말한다. 그것은 확립되고 입증되어 소중하게 지켜온 믿음의 진리에 기초한 가르침과 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바른 생각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명령하신다.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말씀하셨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 5절은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라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사랑과 마음의 겸손 또한 필수적이다.
2. 눈물을 머금고
기독교의 정통 메시지는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바른 교리는 중요하다. 경건한 모범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속에 겸손이 없으면 우리는 바리새인같이 되어, 진리를 다른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막대기로 사용할 것이다. 우리가 겸손하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복음 안에 있는 은혜의 교리를 이해한다면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도대체 왜 나를 선택하셨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그 동일한 기적이 그들에게도 주어지기를 갈망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그 엄청난 지식을 갖고도 나는 작고 우주의 창조자를 알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염려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나를 보세요. 그리고 이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 불쌍한 바보들을 보세요. 당신을 바라봐주는 내가 있으니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우리는 진리를 지키는데 전념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일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작가이자 사상가인 프란시스 쉐퍼는 이런 동정심을 포함한 겸손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 심지어 문화를 분석하고 비판할 때도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했다. 그것이 겸손한 정통신앙이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진리를 위해 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정통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이 오만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실상 우리의 삶이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배치되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마크 데버 목사는 그것을 “겸손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굴복하는 신학이다”라고 표현했다. 만일 진정으로 은혜의 복음을 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다른 이들을 향한 겸손과 은혜의 마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3.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한 것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실한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최선의 지침 하나를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요시야 왕이다. 요시야가 나타날 즈음 유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었다. 여전히 성전이 있고 종교적 행위도 있었지만, 삶은 우상과 부도덕과 부정과 압제로 가득 차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수십 년 전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담긴 두루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성전 수리를 명령한 후, 어느 날 우연히 잃어버렸던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요시야는 그 율법책을 읽게 했다. 그때 보인 요시야 왕의 반응은 가히 본이 될 만하다. 그는 자기보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었고, 율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신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즉 요시야는 “내가 잘못했다. 회개는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이다. 정통은 다른 누구를 공격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찌르기 시작하여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여,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고백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겸손한 정통신앙을 추구하는지 시험해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것만큼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개혁되는데 힘을 쏟는가? 나는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되고 있는가? 그래서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기도하고, 주고, 희생하는가?”
정통교리와 성경적 진리를 충실하게 지지하는 개인과 교회라면 언제나 경건한 회개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의 삶이 모든 면에서 우리가 신봉하는 진리에 미치지 못함을 늘 고백하는 사람으로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우리가 거짓된 가르침을 정죄하는 모습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부르짖는 모습도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옷을 찢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당신의 정통신앙을 겸손하게 유지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정통을 삶으로 실천하라. 당신이 아는 진리를 옆 사람이 알고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보다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데 더 많은 힘을 쏟으라. 당신이 아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평가하라.
4.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근본적으로 세상은 정통과 겸손의 결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죄에 빠진 사람들은 복음 자체를 싫어한다. 거짓 교사들은 여전히 번창하여 추종자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사랑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겸손한 정통신앙은 인기를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며 그것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겸손한 정통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리가 중요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모습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를 지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기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라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방법이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구속받은 사람일 뿐이다.
개혁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자 기쁨이다. 개혁신학을 알게 되면 이전에 모르던 성경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 그러나 개혁신학을 알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기가 쉬운데, 그것은 바로 참된 지식을 얻음으로 인한 교만함이다. 남들이 모르는 참된 지식을 얻음으로 남에게 아무 사랑 없이 그 지식으로 상처를 주고 비난을 하기가 쉽고, 자기 자신만 의롭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나도 당연히 그런 경험을 겪어왔고 지금도 그 더러운 죄와 싸우고 있다.
『겸손한 정통신앙』은 이러한 치명적인 죄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도 벌레만도 못한 큰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진리와 사랑을 같이 전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함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