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은 영성에 대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서적들을 섭렵해도 깊이 있고 흥겨움이 더한다. 그중 서적<춤추시는 하나님>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과 나우웬이 춤출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것도 처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있었다. 끈임 없이 찾아오는 아픔들을 극복하며 극복한 끝에 누리게 되는 환희함이었다. 마치 애통이 변하여 치유의 터가 되게 하고, 슬픔이 변하여 고난에서 춤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 말이다.
고난은 더 깊은 온전함으로 나가는 길이다. 궁극적으로 슬픔이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로 부딪치되 치유자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딪친다는 뜻이다. 음침한 골짜기와 기나긴 밤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으나 하나님이 안무하시는 치유에 춤의 스텝을 통해 상처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이끌려져 나가는 방법이다. 절망을 견디면서 치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치유는 상한 영혼이 다시금 춤추게 하는 치유요.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사는 법을 알기에 고난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춤추게 하는 치유이다.
치유란 성령님께서 나를 춤으로 부르실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고통에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내 삶을 지휘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치유를 찾는다는 것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한다는 것이요. 영원한 사랑과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몸의 상태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함으로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이루는 것과 더 연관이 깊은 것이다. 나우웬이 깨달은 치유는 마귀가 의도한 고립 상태에서 내 고난을 끄집어내 모든 고난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겪는 것임을 바로 아는데서 시작한다고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치유에 춤과 기쁨의 축제에 온전히 들어가는데 있어서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싶다. 자신의 좁은 자아에서 넓은 세상으로 옮겨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길은 없을 것이다. 감사의 삶에 태도는 예배와 신앙훈련을 위해 따로 떼여 놓은 시간이나 인생에서 쉽게 보이는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태도이다. 감사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이라고 고백한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갈 때 인생이 전환되어져 가는 일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과 정비례하다. 슬픔과 복을 한데 엮어 기쁨의 스텝을 내딛는 것이 곧 찬미의 춤임을 깨닫는다. 진정한 감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일과 아픈 일에 부분을 가리지 않고 삶 전체를 끌어안는다.
인생에서 중대한 질문 중 하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나는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이 또한 내 삶을 원망으로 대할 것인지 아니면 감사로 대할 것인지는 선택하는 나름대로 갈림길이 결정되어질 것이다.
애통은 춤추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일어나 스텝을 내딛게 첫발걸음이다. 우리의 아픔과 예수님의 고난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애통하는 것은 자신에게 정체감을 주는 그 무엇을 대해 죽는 것이다. 고난은 영적인 삶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슬픔으로 들어오셔서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며 춤을 추자고 청하신다(시30:11).
춤출 때 우리는 자신의 좁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이 춤동작으로 그 자리를 뛰어넘게 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더 큰 춤의 자리로 들어가기도 한다. 왜냐하면 타인들도 함께 춤추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고민과 기다림 속에 선물로 찾아오는 순간은 하나님이 고난을 통과하는 길에서 그 사람과 만나는 깊이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해야 한다. 이것이 춤의 첫 스텝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으나 치유와 춤은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데서 시작한다. 상실과 상처를 벗어나는 길은 그 속에 들어가 상실을 통과하는 것이다. 상실에 직면한다는 것은 인생을 단순한 생계유지 작업으로 보려는 유혹을 물리친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에 많고도 많은 고통과 손잡아주시며, 바로 여기서 희망과 새 생명의 시작을 맛보라고 하신다. 아픔과 고통과 상처의 한복판은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에게 더 크신 분의 손에 상처를 내려놓는 시기이다.
그분 안에서 상실을 슬퍼할 때 우리는 결국 자신이 사랑받는 사람임을 주장할 수 있다. 슬픔은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상상할 수 없는 미래를 열어주도록 만든다. 바로 춤이 있는 미래 말이다. 사실 슬픔과 질병과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길을 발견한다. 그 길은 우리의 삶에 한 가닥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비록 빛은 희미하고 우리의 삶 역시 불완전함을 안전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내일을 믿는 우리가 오늘을 더 잘 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슬픔에서 기쁨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옛 삶에서 새 삶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 가운데 거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 슬퍼하는 중에도 우리는 우리 삶이 하나님의 더 큰 생명과 희망의 춤과 합류하리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중 슬픔과 아픔이 있는 것은 소유에 불과하다. 소유 방식으로 대인관계에 접하면 많이 실망하게 된다. 무조건 기대하라는 짐을 지게 하면 그 부담 때문에 관계가 깨질 수 있다. 우리는 더 고립되며 자신의 실망과 슬픔에 속박 받게 된다. 친구는 동료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받기를 기대하게 된다.
우리가 겪는 고난에 상당부분에는 외로움에서 생기며, 그 외로움은 자신의 높은 욕구 때문에 깊어지는 가운데 세 가지 방식으로 슬픔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강렬한 요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둘째로, 활동주의로 타인을 조종하고 조건을 달아 사랑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상대를 사랑하는 긍휼함이 경쟁적인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긍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어떻겠는가? 긍휼에는 단순한 연민의 발동이나 동정의 말 이상이 있어야 한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하나님만이 진정한 긍휼을 품으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그토록 가까이 대하시고,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잘못을 지적하고, 아픔을 치유하며, 자상히 돌보실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람들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슬픔을 함께 나누시며 우리를 불러 춤추는 법을 배우라고 하신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같이 누리는 방법이요.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또 다른 길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엠마오 도상에 장면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화되게 만들어 준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삶은 떠남의 연속이다. 과거를 떠나 더 많은 독립과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지리에 이르는 과거로부터 죽는 것의 연속이다. 죽음이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요.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 아무도 죽음의 실체를 피할 수 없다. 아무도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한계를 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고통은 새 생명을 낳는 해산의 전통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 새 생명이 나오게 하는 진통 말이다. 슬픔 가운데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결코 홀로 걷지 않을 것이다. 슬픔의 밤을 지나 희망의 아침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더 춤을 잘 추며 동행하겠다.
우리가 희망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비록 세상이 어둠에 덮여 있다 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선언하신다. 물론 희망이 있다는 것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희망은 고난을 통해 성숙하고 정결해지며, 삶이 달라진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와 치유의 임재에 눈뜨게 만든다. 믿음이란 희망에 여지를 두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결과를 믿음의 대상에게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믿는 법을 배운다. 물론 운명론을 벗어나서 성장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겠지만, 우리의 희망에 근거는 삶과 고난보다 강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시기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을 정확히 선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너를 위해 집을 준비하고 있다. 내 집에는 방이 많다(요14:2-3)"고 말이다. 바울에 말을 빌려 쓰자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다(롬12:2).
무덕한 나무에서 화사한 꽃이 피어나며 탐스러운 열매를 매져지기까지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이 피어나기까지는 싹이 트이는 기간이 있으며, 열매를 맺어지기까지는 길고도 기나긴 시간을 걸쳐야 한다. 그중 화사한 꽃을 피우는 기간은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기간보다 아주 짧으며, 열매를 맺는 기간이 긴긴 기간을 기다려야하겠으나 화사한 꽃은 잠시 피었다가 잠시 살아져 버리지 않던가?
이렇듯 고난이 길면 영광도 크며 아픔이 긴만큼 상처 입는 사람을 향하여 치유의 사람으로 나갈 수 있는 치유의 길에서 든든하게 걸어가지 않던가? 우리에게도 침묵과 고독을 겪으며 인생에 참 의미를 경험할 수 있겠다. 저자도 춤추시는 하나님이 될 수 있기까지는 그동안 아픔을 겪으며 치유 받은 상태에서 자유와 평안과 충만함을 공급받으며 춤을 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을 예를 들어보겠다. 다윗의 삶 중에 사울에게 쫓겨 다녔던 모습은 아주 첩첩산중인 고난을 하나님과 함께 겪어가면서도 한편 삶에 의미를 경험하는 것을 본다. 그렇지만 우리아의 처를 범하는 순간 범죄로 그 동에 쌓아놓았던 영광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회생해 본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마귀에게 미혹받기 쉬운 연약한 부분이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동안은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겠으나 떨어질 무렵에는 한 순간이다.
그런즉, 탐스러운 열매 맺는 긴긴 기간에 피할 수 없는 따사로운 햇빛과 쌀쌀한 맞는 바람을 맞이하겠으나 떡잎은 떨어지며, 탐스러운 열매만 남아 주인님에게 결실하시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오늘날도 주인 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흥겨운 삶을 영위하자고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늘 기다리는 지혜로운 신앙인으로 거듭나야함을 느껴본다.
PS<남기고 싶은 말>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구나!
고통 속에 숨겨진 것은 오직 영광뿐이구나!
영광은 고통 속에 숨어 있는 보화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