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과 초월 사이
kalavinkaa 2005/11/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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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이냐, 초월이냐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황지우는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퇴행이나 현실 너머, 즉 초월을 꿈꾸는 모습을 시 곳곳에서 보이게 된다.
울 엄니 일 나가고 안 계시면 혼자서 마당에서 해 보고 놀았더랬습니다. 오래오래 보고 있으면 해는 똥그란 물이었다가 환한 구멍이었다가 장광에도 토방에도 정재에도 돌아다니는 빛 솜사탕이드라고요. 잡으면 제 꼬막손 밖에 또 나타나는 해, 저는 해 잡으로 종일토록 집 안을 갈고 다녔지요, 뭐.
그러다 어느 날 울 엄마 보따리 인 이마에 노을을 밀고 집에 들어오셨을 제, 제 눈에선 누런 진물이 났고, 눈이 퉁퉁 부어 보이지 않던 날, 엄니 절 업고 시내 병원엘 갔죠. 눈을 까뒤집고 들어오는 안과의 빛, 포르말린 냄새나는 엄청나게 큰 해가 제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만큼 울었습니다.
그날 밤 엄니 품에서 잘 때 제가 쪼물딱쪼물딱 만진 울 엄니 젖, 제가 잡은 해.
-「太陽祭儀」부분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중략)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숨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가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부분
「太陽祭儀」에서 화자는 어린 화자이지만 시인이 시적 소재를 선택할 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본다면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현재의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어린 시절의 자신은 가지고 있기에 시적 소재로 선택한 것이다. 바로 ‘해’와 ‘어머니’가 지금 현재의 나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내게는 있었던 것이다. ‘해’와 ‘어머니’는 완전한 존재로 시적 화자가 원하던 바를 무엇이든 충족시켜주었다. 아버지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의 고통이 있던 어린시절이었지만 그 고통을 달래주는 엄마의 품이, ‘쪼물딱쪼물딱 만’지며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어머니의 젖이, 완전한 따스함의 상징인 해가 있었던 것이다. 「살찐 소파의 日記」에서 화자는 아내에게 어머니와 같은 완전함을 바라는 욕망을 담아 ‘아내를 껴안으면서 ꡒ엄마ꡓ라고’ 부른다.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엄마가 아이에게 그렇듯 아내가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즉 자신이 행하지 않았기에,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존재이기에 아무 책임질 필요도 없는 아이가 되고자하는 퇴행의 욕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어머니는 시적 화자를 감당하기는커녕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기고 오히려 시적 화자에게 ‘당신의 밑’을 씻는 행위‘까지 의지하고 있는 ’꼬마 계집아이‘(「안부1」)가 되어버렸다. 그와 반대로 시적 화자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식물인간처럼 살아간다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자아인 어른이 되어있다. 아내와 책임질 아이들까지 있는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의 퇴행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이와 반대로 초월을 꿈꾸기도 한다.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等雨量線1」부분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아직은 바깥이 있다」부분
「等雨量線1」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현실 세계, 부정하고 싶은 그 세계가 좁다고 느껴질 때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바깥은 안과 대립하는 바깥이며, 삶과 대립하는 죽음의 세계이다. 안과 삶에 존재하는 시적화자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이는 곧 초월의 욕망을 일컫는다. 그들은 안과 삶에 존재하는 시적화자가 볼 때 자신의 삶과 너무도 달리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는 듯 느껴져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삶에서 좌절되어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 굶주림과 권태를 동시에 넘어선 곳;/ 난 거주할 수 있는 낙원을’ 자신의 죽음 이후의 생에서 찾으려 한다.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고 말하며 그리하여 ‘불티 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벅 쓰고’ ‘서울서 벗들 오면/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해주고 ‘그들이 돌아갈 땐/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눈에 넣어주리라’(「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고 소망한다.
하지만 퇴행할 수 없듯 초월도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황지우는 알고 있다. 자신은 분명히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처럼, ‘문 안’에 있는 ‘검은 소’(「바깥에 대한 반가사유」)와 같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자이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자에게 바깥은 ‘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가는 것처럼 스칠 때만 존재하는, 스칠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스치기만 한다면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等雨量線4). 하지만 생은 스치듯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치기만 하면서 보는 바깥은 ‘다 재가 된/ 숯덩이 정원’이며, ‘한낱 광희에 불과’(「섬광」)한 낙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죽음 뒤에 무엇인가’ 있는지, ‘죽음 뒤에 정말로 아무것도 없’(「햄릿의 진짜 문제」)는지 살아있는 자신은 알 수 없기에 현재의 삶과 대립되는 죽음으로서의 바깥 역시 자아 부정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퇴행과 초월 모두 현재의 자아 부정으로 생겨난 순간, 스치듯 지나는 것이다. 결국 황지우는 시집 『어느 날…』에서 퇴행도 초월도 자아 부정 상태의 대안으로 선택하지 않고 자아 부정 상태의 자신을 손에 쥐고 직시한다.
제비들, 돌아가려고 흐린 날에도
나가서 편대 연습하고 돌아오는데
방죽에 억새 덤불이 뒤집히면서
일제히, 풀잎 뒷면의 은빛을 드러낸다
저기 멀리 오키나와 섬에서 바람이 불고 있을 거다
초록빛 방죽 물의 거죽, 心亂하다
그리고 축 처진 하늘을 이고서 몸부림치는 풀밭;
방금의 生을 잊어먹은 듯
흑염소가 거기서 목놓아 울고 있다
저기 묶은 밧줄을 더 세게 끌어당기면서
-「흑염소가 풀밭에서 운다」전문
이 시에서 등장하는 제비, 억새, 흑염소 모두 퇴행과 초월의 욕망을 함께 가진 존재들이다.
제비의 날개, 억새의 풀잎, 밧줄에 묶인 흑염소는 퇴행과 초월의 양면을 표현한다. 그 둘을 선택하지 않기에 흑염소는 밧줄을 끌어당기며,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흑염소 상태로 황지우는 『어느 날…』에서 시적 화자의 모습을 나타넨디/ 퇴행과 초월의 순간은 섬광처럼 지나가는 아름다움으로 기록될 뿐 자아 부정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어느 날… 』은 시집 전체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초기 시보다 시적 긴장은 증폭하고 있다. 초기 시에서 사회와 자아의 갈등으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어느 날…』는 사회와 자아가 갈등하고 있으며 그에 더하여 자아 안에서 퇴행과 초월이 부딪히며 긴장이 더욱 중첩되고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황지우의 『어느 날…』을 읽는 내내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영원과 하루’의 한 장면이 떠나질 않는다. 국경지대에서 사람들이 철조망에 넘어가지도 도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한 장면이다. 황지우가 유지하고 있는 『어느 날…』에서의 시적 긴장은 그토록 처절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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