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를 찾아서
kalavinkaa 2005/11/1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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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찾아서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돼지같이 과욕할 줄 모르고/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이며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염소를 찾아서1」)을 가진 염소는 현재 부재중이다. 시집에서는 시적화자가 납부금을 내려고 새끼 밴 염소를 몰래 내다팔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이상 염소가 풍월을 읊으며 고독을 즐기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기본적인 자신의 백면서생의 성품을 살아갈 수 없기에 ‘그만 탈출하고 싶다/검은 절망의 외투를 벗고/구닥다리 수염도 깎고/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이제 시인은 안다. 자기가 납부금을 내기 위해 팔아버린 그 염소는 자기가 정작 찾고 싶은 자아였다는 것을.
이 시집을 읽기 전 ꡔ귀로 웃는 집ꡕ을 먼저 읽어서 인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 나오지 않던 현실 공간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시인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와 같이 초월적 자아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면서생의 성품을 지니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과 자아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시인의 지향점이 시인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현실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대만원인 서울의 파편처럼 생겨나는 경기도의 도시들(「果川別曲」), 그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울이라는 중심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서울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고 있고,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옭아매며 노예처럼 바쁘게 끌려 다닌다(「넥타이」). 시 「회전문」에서는 빡빡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시인의 눈에 회전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하루를 거대한 공룡의 아가리에 전신을 구겨 넣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가시만 남은 채 분해 되고 밤이 되면 납작한 오징어가 되어 거리로 토해진다.
이런 공간에서 시인은 ‘노란 티켓 한 장 사들고/하행선 열차를 기다리는 사십대’(「안전선 밖에 서서」)의 자신의 삶이 서럽고 부끄럽다. 자신이 원하는 자아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는 자기를 지우고 싶어 하는 시인의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눈 오는 날에」에서는 ‘이미 잘못 산 생애와/스스로 절망한 자는/과거를 표백하듯 망각’ 하고 싶어하고 「권태를 위하여」에서는 ‘꾸벅구벅 졸다 가다가/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누」에서는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자신에 삶에 대한 부끄러움은 자신을 지우고 싶은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 대상들에게 끝없이 연민하기도 한다. 불구된 아이들이 황홀한 부채춤을 추는 모습은 시인을‘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고 ‘내 멀쩡한 四肢’를 부끄러워하게 한다(「채송화」). 그리고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를 욕하기보다 시인이 사는 시대에 그 사내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연민을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정은 하지만 그의 ‘염소’를 찾고 싶은 열망에 의해 늘 보류된다. 그래서 시인은 늘 ‘한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오늘도 낯선 길을 헤’(「미로찾기」)매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온갖 애증을 지우고’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12월」)를 찍자고 한다. 이 마침표는 끝으로 가는 망막함이나 슬픔이기보다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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