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단절로 이어가는 과거와 현재
kalavinkaa 2005/11/1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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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단절로 이어가는 과거와 현재
-ꡔ우울氏의 一日ꡕ과 ꡔ자본주의의 약속ꡕ
소외된 자
유하가 소비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스스로 그 배에 함몰해 가는 소비 대중의 모습이었다면 함민복은 그와 다르다. 그의 가난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함민복은 소비자본주의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본 소외 계습에 속한다. 유하가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소비자본주의를 의식적으로 비판하려했던 것에 반해 함민복의 소비자본주의 비판은 체험적이다. 둘 다 시에서 풍자와 위트를 보여주지만 유하가 사용한 풍자와 위트가 제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데 비해 함민복의 풍자와 위트는 읽는 이에게 소비 자본에서 소외된 사람의 쓸쓸한 풍경을 가슴에 새겨놓는다.
시「라면 먹는 아침」에서 살펴보자. 시「라면 먹는 아침」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거지보다 덜 가난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아침 식사는 단무지와 라면이다. 그리고 그는 라면의 국물의 양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금을 풀어 넣는 생활을 한다.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그는 라면 아래 까는 신문지에서 철거민 소식(즉 소외 계층)과 과하게 먹는 현대인들에게 변비약을 권하는 광고를 동시에 본다. 굴비는 매달아 쳐다만 보고 밥만 먹던 영감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과하게 먹는 현대인들을 굴비처럼 쳐다봐도 배가 부르다고,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상다리가 부러진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아침 풍경은 너무도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을 넘어서려는 그의 위트는 그 스스로에게는 건강한 위트이며, 동시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팍팍함을 더욱 배가시켜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사실 생득적인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가난에서 멀어질 수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이 시 속에서 등장한다. 시 「박수소리1」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예일 것이다. 그 날의 운동장 조회는 그에게 '라면박스를 주셔 고맙습니다'로 기억되는 시절이 아니라 가난의 징표가 공공연하게 자신의 가슴에 새겨져버린 날이다.
유년의 공간과 단절
하지만 그런 가난한 시절에서 시적 화자는 가난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시「달, 향수의 포석-약초 캐며 살던 시절을 추억함」에서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약초를 캐러 다닌다. 어린 화자였기 때문에 약초 캐는 일이 노동처럼 느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약초 캐는 일은 ‘어둠이 山 담는 것도 모르고/ 신바람나던’, 자신을 끌어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둠에서 환한 빛을 만들어주는 달처럼 느껴졌던 시절이다.
비록 어머니, 아버지는 밤새도록 캐야하는 그 노동이 힘이 들었겠지만 그러한 노동은 소비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에 비해 건강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동은 서로에게 분리되지 않고, 자연과도 분리되지 않아서 따라다니는 시적 화자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끊임없이 일을 하지만 자식과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자식들은 그들 부모의 노동이 고되다는 사실도 모르고, 부모의 고된 노동이 자신을 유지해주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비 자본 사회로 진입은 그의 유년시절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경로당」에서 노인들은 명아주대 지팡이로 말줄임표를 찍으며 다른 노인의 꽃상여를 따라간다. 한 시대, 즉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농촌을 지켜왔던 사람들이 죽어간다. 시「한겨울의 노래」에서는 시적 화자의 아버지가 죽는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소비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죽으면서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함민복은 그것을 「한겨울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술 한사발에 상여소리 더 구성진 상여꾼의 발자국도/뒤돌아보면 눈 덮여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또, 눈송이처럼 어디로 쓸려가야 하는지’라고. 소비 자본주의로 진입하는 시대에 아버지의 죽음은 소비 자본주의가 장악해버리는 시대이다. 자신의 생의 근본이었던 황토 속에서 발 디디며 일하던 날들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뿌리가 끊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어디론가 떠나가는구나/뿌리가 더 괴로웠으리라/나는 씨 없는 수박’(「수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난 시기와의 단절을 함민복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 안의 문화에서도 찾아낸다. 시집 ꡔ우울氏의 一日ꡕ에서 시적 화자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4년 일하고 퇴직한 사람이다. 그의 퇴직은 정신병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지금 15% 할인된다는 한국전력 부속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야 친구들을 만난다. 그는 현재 죽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죽음 콤플렉스는 산업 자본이 생성한 것이기도 하다. 산업 자본은 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의 위험성을 늘 감추려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대중매체는 공공연하게 그들이 일하는 환경의 위험성을 노출한다. 자신이 일하는 공간의 일을 그 공간이 아닌 타 공간에서 알게 되는 괴리감. 자신이 일하는 공간과도 단절되어 있는 화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단절되어 있다. 지하철에 빼곡이 들어선 사람들은 서로 강제적 카섹스를 당한다고 생각하며(우울氏의 一日․1」), 시적 화자는 현실의 사람이 아닌 광고에 등장하는 여인과 (상상으로)사랑에 빠진다(「자본주의의 사랑」). 자연 역시 인간과 분리되어 현란한 간판과 시멘트를 잠시 있게 하는 최면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여행에 대한 비관론」).
유하와 함민복의 유년의 공간
여기서 유하와 함민복의 시에서 공통점이 나타난다. 그들은 둘 다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또 시집 안에 유년의 공간을 삽입한다. 80년대 시인들이 정권 비판에 몰두했다면 90년대 시인들의 비판 초점은 소비 자본주의에 놓여 있다. 좀 더 살펴보아야 할 일이지만 90년대 시인들이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반대 공간으로 유년의 공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 공간을 시 안으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던 공간으로 유년의 공간은 모든 시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유하의 하나대는 시집에서 적절하게 배치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도 분리되어 버린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곳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작위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래서 유하의 하나대는 건강하게 보이는 삶에 공간이 될 수 없다. 단지 회상의 공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소비 자본주의 시대와 분리된 의식적이고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함민복의 유년의 공간은 그렇지 않다. 함민복의 유년 공간은 끊임없이 지금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예로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를 들 수 있다. 유하의 하나대가 이미 죽어버린 증거는 그는 그 이후의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민복의 어머니는 현재적 의미로 함민복의 시 편에 변화하며 등장한다.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에서 함민복은 본격적으로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첫 번 째 시집 ꡔ우울氏의 一日ꡕ에서 현재와 분리되어 버린 유년의 공간이 한없이 시적 화자를 한없이 아프게 하며 단절만을 되새김질하게 했다면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에서 소비 자본주의의 비판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의 유년은 유년의 공간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서도 끊임없이 그러한 공간을 찾아내게 한다. 형과 함께 일한 양돈 농가에서의 일들이 그것에 속한다. 그리고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을 살펴보자면 유년의 공간이나, 현재적 의미로 변화한 유년의 공간이 소비 자본주의에 대해 쓴 시들 사이사이에 끼여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치로 봤을 때도 그는 유년의 공간을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비 자본주의의 행태를 비판하는데 유용한 공간으로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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