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와 머뭇거림의 서정
1980년대 후반 남한 사회는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소비사회를 파고들고 강압적인 자본제국주의 문화가 자리잡는다.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개인의 욕망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도망간다. 소비자본이 낳은 것은 결국 도망가기이고 도망가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킨다. 현실 공간의 삶은 도외시 된 채 거짓, 가상 공간의 이미지와 허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립되기도 한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의 모습을 장정일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서 써내고 있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는 소비자본의 이중적 속성을 캐내기 위해 그는 감동으로써의 시,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한다. 이영준이 말한 날것으로 드러내기, 즉 감동을 파괴하는 시를 쓰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구체적 형식을 환유적 서술에 중점을 두고 논의했다. 장정일이 사용하는 환유적 서술은 두 얼굴, 혹은 다중의 얼굴을 가진 제국주의적 소비 자본의 허상을 드러내는데 큰 몫을 한다.
장정일은「햄버거에 대한 명상」통해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의 허상 드러내기와 기존 시 문법 파괴를 동시에 행한다. 이것들의 밑바탕엔 아버지로 상정되는 중심, 권위적, 획일적인 것에 대한 부정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소비자본과 가부장제가 이어져 있다면 그의 부정의 실현가능성은 항상 위기에 내몰려 있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장정일도, 시적 자아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사회 현실, 바로 그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장정일은 어떤 희망도 꿈꾸지 않는 것일까? 그의 욕망은 항상 좌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욕망의 대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골목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구멍가게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 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장정 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 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 둔덕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 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 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 간다.
-「강정 간다」부분
사람들이 모두 가고 있는 그곳, 의심하던 화자까지 찾아가는 강정은 대체 어디인가. 시적 화자도 강정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어디서 배운 듯 익숙하다. 그 길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끌고 간 죽음의 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들 웃으며 가는 걸 보니 마치 유원지를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곳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도 자신에게 익숙한 길, 강정이라는 곳을 알 수 없어 주저하고 망설인다. 주저와 망설임의 서정. 그의 희망이 미끄러지며 내는 발자취. 그 발자취 역시도 금새 사라질까봐 강정 가는 그에게서 자꾸만 머뭇거리게 한다. 그래서, 그 희망은 범박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미약하고 불안하게 깜박이는 카바이트불빛처럼 더욱 처연하고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