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도시에서 무덤을 건지는 ‘水夫’
- 최승호,『대설주의보』와 『세속도시의 즐거움』
1980년 후반 등장하는 도시시의 한 시인으로 명명되는 최승호의 시들을 읽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저 외딴 농촌까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모텔과 음식점이 높게 세워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빌딩과 도로가 가득차는 그 날까지 도시화, 개발을 외치는 곳에 여전히 우리는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최승호가 지나온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가시적으로 다르지만 한 공간에 살고 있다. 최승호가 문제시하는 것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묶인 채로, 혹은 더욱 돌돌 뭉쳐 그 근원을 찾기 어려워졌다. 아니,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멍하게 하루하루를 일상에 묻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3년『대설주의보』출간 후, 최승호는 두 시집『고슴도치의 마을』와『진흙소를 타고』 거쳐 네 번째로 1990년에 『세속도시의 즐거움』을 출간한다. 그는 지속해서 쓰레기 같은 욕망이 엉킨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집중한다.
도시의 비유 1- 통조림
그는 두 시집 모두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통조림에 비유한다.(『대설주의보』에서는「통조림」,『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는「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팝 아리스트 앤디 워홀이 <복숭아 통조림>과 <켐벨 스프 통조림>(미국인의 80%가 당시 이 통조림을 구매했다고 한다.)에서 표현한 바 있듯 통조림은 현대 도시 사회에서 필수품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 먹을까를 고민하고, 장을 보며, 요리할 여유가 없다. 음식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성과 먹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는 말은 TV, 어느 유명한 요릿집 주방장의 입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음식 맛이 다르다는 말 역시 이제 유명무실하다. 사람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음식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TV에서 먹을 사람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그 주방장이 요리하는 요릿집에 데려갈 수 있냐, 없냐로 서로를 평가한다. 통조림을 먹는 도시인들에게 요리는 더 이상 배를 채우는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통조림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의 입맛은 거의 일정해진다. 입맛의 일정은 대량 생산품처럼 사람들 역시 일정해져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통조림은 단지 대량 생산품이 아니라 도시와 도시인들의 은유가 된다. 사람들은 통조림 도시에서 죽었지만 살아있는 듯, 썩지도 않는 통조림 속 꽁치 같은 생을 살고 있다.
도시의 비유 2-변기
변기에 관한 시는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 등장한다. (「지루하게 해체중인 인생」,「똥구덩이 속에서」,「변기」,「거품座의 별에서」가 그에 해당한다.) 특히 「변기」에서 우리는 변기를 도시에 비유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변기는 도시이며, 변기에 휩쓸려가는 변은 도시인이며 뱅뱅 한없이 도는 것은 도시의 삶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아무 변화 없이, 일상을 뱅뱅 돌기만 하다 구멍, 즉 죽음으로 가게 된다.
김기택의 시「사무원」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도시의 삶이란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몇 시간씩 교통체증을 뚫어야 하며,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기보다 지루해 점심시간을, 6시 퇴근을 기다리며 견뎌내야 한다. 그 후 그들은 술에 그들의 원인 모를 고통을 쏟아 붓고, 들이마시며 잊고 싶어 한다. 도시인에게 술은 사람들과 즐기기 위함보다 망각의 상태로 들어서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자신이 살았던 하루를 무덤에 묻고 싶어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뚫고 갔던 그 곳에서의 하루가 얼마나 값어치 없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잊고 싶어 하는 걸까. 최승호는 변기, 우리가 매일 마주대하는 일상적 사물을 통해 도시인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로 미술의 가치를 뒤집었다면 최승호는 변기로 현대사회의 삶을 드러냈다.
도시의 비유 3 -무덤
획일화되고 가치 없는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도시는 결국 무덤으로 최승호의 시에서는 귀착된다. 무덤이나 죽음이라는 말은 그의 양 시집,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설주의보』의「물 위에 물 아래」에서 가장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잔잔한 호수를 관광하며 지나가지만 정작 그 호수는 시체들이 즐비하다. 그 시체들을 건지러 水夫가 등장한다. 水夫는 도시가 숨겨놓았지만 구석진 곳으로 발을 옮기면 찾아볼 수 있는 시체로 표현되는 도시의 폐기물들을 보고 있는 시인 자신이다. 水夫가 간 곳에는 태아, 애벌레, 고양이, 개,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 통, 비닐 조각 등이 즐비하게 무덤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죽어있는 것들은 위의 것들만이 아니다. 산모는 자신의 태아를 고무인형(「공장지대」)으로 느끼고, 여자들은 정육점의 잘려진 고기(「赤身」)로 표현된다. 그리고 서로를 죽었다고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 스스로도 죽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승호의 시에서 사물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이 다르지 않다. 특히 「렌트카의 길」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의 단 며칠을 위해 태어나는, 다른 것들과 별 다른 특징도 없는 렌터카다.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달리고만 있다. 그냥 지하철을 뚫고, 도로를 뚫고, 엘리베이터를 뚫고 하루를 살아간다. 사람과 사물을 도시의 사회에서 이제 별 우위를 가릴 것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위에서 최승호의 시집에서 도시의 은유로 읽었던 통조림, 변기 역시 결국 무덤으로 귀착된다.
최승호의 시를 읽으면서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스스로 얼마나 무뎌져 왔는가를 느꼈다. 그는 모든 획일적이고, 단일화되는 도시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도시적 사물을 찾아내는데 민감한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은 정서가 둘러붙은 것들에게도 작용한다. 「조용한 연못」에서 연못위의 소금쟁이가 시의 처음에 등장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정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평화로움의 연상시키는 소금쟁이가 떠 있는 연못은 최승호에게로 닿는 순간 독자들은 그 평화로움에서 배반당한다. 소금쟁이가 평화롭게 떠있는 그 아래는 익사채가 엉겨져 있다. 그리하여 도시에서 느끼는 부조리함은 평화로움을 떠올리는 연못에서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